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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단어 1분으로 끝내는 경제공부』 3장

목차
3장 경제역사

28 자본주의의 역사 : 자본주의의 얼굴도 바뀔 수 있을까?

29 상업 자본주의 : 자본주의에도 태아의 시기가 있었다?

30 산업혁명 : 인류의 풍요를 가져온 사건은 무엇일까?
31 산업 자본주의 : 자본주의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을까?

32 독점 자본주의 : 변질된 자본주의가 식민지를 찾기 시작한 이유는?

33 대공황 :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역사상 최악의 경기침체는?

34 뉴딜정책 : 대공황 해결을 위해 정부가 꺼내든 새로운 카드는?

35 수정 자본주의 : 자본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고쳐 쓰는 방법은?

36 석유파동 : 주유소에 기름이 모자랐던 시기가 있었다?

37 신자유주의 : '철의 여인' 대처 총리는 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을까?

38 세계 금융위기 : 금융시장을 덮친 미국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위기는?

39 일본의 버블경제 : 일본의 빛나는 전성 시대는 어떻게 끝났을까?

40 3저 호황 : 우리나라 경제의 최대 황금기는 언제였을까?

41 1997년 외환위기 : 한국 경제의 역사를 뒤바꾼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을까?

경제로 세상 읽기 I : 어두운 미래를 다룬 디스토피아 영화가 많은 이유는? - 4차 산업혁명과 미래

경제로 세상 읽기 II : 코로나19 이후 정부에서는 왜 재난지원금을 주었을까? - 재난지원금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28 자본주의의 역사 : 자본주의의 얼굴도 바뀔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초·중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학비를 나라에서 지급하기 때문에 누구나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19세기 영국의 노동자 계층에서 태어났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대여삿 살 때부터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 했을 수도 있다. 심지어 새벽3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면서 온종일 혹사당하고 학교도 다니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21세기의 대한민국도 19세기의 영국도 모두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왜 두 시기의 어린이들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까? 우리가 어릴 때부터 찍은 사진을 보면 내 모습이 조금씩 바뀌어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듯. 자본주의 역시 오랜 역사와 여러가지 사건을 거치면서 그 얼굴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살펴볼까? 자본주의에서는 공장이나 기업을 세우고 노동자를 고용해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가가 중심이 된다. 그들은 상품을 판매한 후 이윤을 얻는다. 예를 들어 게임 회사가 온라인 게임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은 기본적으로 게임을 판매해 돈을 벌기 위해서다. 게임 회사는 소비자에게서 판매 수익을 얻어 노동자나 투자자 등에게 생산에 참여한 몫을 나누어 준다. 모든 몫을 다 떼어 주고 남은 이윤은 게임 회사의 사장이 가져간다.

 자본주의의 기본 바탕은 이와 같지만, 그 모습은 계속 바뀌어 왔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서 그 성격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국가가 시장에 얼마나 개입하느냐' 다.

 자본가와 시장에 모든 경제문제의 해결을 맡기고 시장을 자유롭게 놓아둘 것인지, 아니면 국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간섭할 것인지 그 문제에 대한 답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바뀌어 왔다.

 자본가들이 경제력을 키운 상업 자본주의를 거쳐 상업혁명과 함께 본격적인 자본주의의 발달이 이루어진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는 국가가 경제에 간섭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동 조절되도록 시장에 많은 일을 맡겨 두어야 한다는 믿음이 우세했다. 그러다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쌓이면서 국가가 경제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수정 자본주의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나라가 경제문제에 개입하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기자, 이번에는 정부의 경제 간섭을 줄이자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학의 흐름이 세상을 지배하기도 했다. 자본주의의 모습은 시대의 상황과 몇 가지 사건을 계기로 계속 변화해 온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자본주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얼굴을 바꾸어 갈 가능성이 크다.

 

29 상업 자본주의 : 자본주의에도 태아의 시기가 있었다?

'신항로 개척' 사건을 역사 시간에 들어 본 적 있는가?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 마젤란 Ferdinand Magellan 등 유럽인이 동양이나 신대륙으로 가는 새로운 바닷길을 찾아낸 사건을 말한다. 왜 탐험가들은 새로운 바닷길을 찾아 항해했을까?

 동양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면 동양에서 좋은 상품을 들여오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실제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의 상인들은 아시아나 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만들고 무역을 하며 향료, 차, 금, 은 등 값진 물건을 유럽으로 들여와 비싼 값에 팔았다. 무역으로 큰돈을 벌기 시작한 상인계급은 점차 경제적으로 강력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때 상업이나 무역활동으로 자본을 축적한 상인들은 더 많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 도시 수공업자나 농민들에게 원료와 도구를 제공하고 미리 필요한 만큼 상품을 만들도록 주문했다. 상품이 다 만들어지면 이를 시장에 팔았다. 이러한 생산 방식을 '미리 대금을 맡겨 생산하게 한다' 는 뜻의 선대제 先貸制 라고 한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부 수공업자들은 노동자들을 한 곳에 모은 다음, 분업을 하도록 해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게 했다. 이를 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처 Manufacture 라고 부른다. 이렇게 선대제와 공장제 수공업에 기초해서 많은 상품을 판 상인들은 점차 더 큰 부자가 되었고, 자본을 쌓았다. 이것을 자본주의 역사의 초기로 보고, 상업자본주의라고 한다. 상업자본주의란 상업, 즉 상품을 사고파는 유통과정에서 이윤을 얻는 자본주의를 말합니다.

 사실 본격적인 자본주의의 시작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산업 자본주의 시기로 본다. 그렇지만 이전 시기인 16~18세기에도 자본주의가 발달할 조짐이 보였던 셈이다. 아직 공장에서 기계를 써서 상품을 대량생산한 것은 아니었지만, 집안에서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 물건을 만들던 이전의 가내 수공업을 벗어나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조직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선대제와 매뉴팩처를 자본주의의 초기 모습으로 본 것이다. 이를 마치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 뱃속에 태아로 존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흔히 자본주의의 태동기라 부른다. 그래서 이 시기를 상업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30 산업혁명 : 인류의 풍요를 가져온 사건은 무엇일까?

1769년, 영국에서 세계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칠 발명이 일어났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이라는 동력 기관을 만든 사건이다. 증기기관은 물이 끓을 때 나오는 수증기의 힘을 이용해 기계가 저절로 움직이게 도와주는 장치인데, 와트가 이것을 산업현장에서 쓸 수 있게 바꾼 것이다.

 물론 와트의 발명 이전에도 영국에서는 공장에서 상품을 만드는 생산 형태가 발전하고 있던 참이었다. 특히 면직물과 모직물을 만드는 섬유공업이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목화나 양털에서 실을 뽑아내는 기계인 방적기와 실로 섬유를 만드는 방직기라는 기계가 공장에서 쓰이고 있었다. 이 방직기와 방적기는 원래 사람의 손이나 수력으로 움직였는데, 여기에 증기기관은 달자 기계가 자동으로 움직이며 질 좋고 값싼 섬유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었다.

 원래 방적기로 실을 짤 경우 면화 45kg로 실을 만드는데 2000시간의 노동이 필요했는데 와트의 증기기관을 방적기에 결합할 경우 300시간이면 똑같은 양의 실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생산성이 증가했다.

 기계로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되자 섬유공업뿐 아니라 기계공업, 제철업도 발달했다. 증기를 끓이려면 연료가 필요했고, 이 연료로 적합한 것이 석탄이었기에 석탄 산업도 급격히 발전했다. 이제 집에서 손으로 상품을 만들던 가내 수공업 시대는 지나가고 공장에서 기계를 이용해 대량생산을 하는 공장제 기계공업 시대가 왔다.

 공장이 생기고 산업의 규모도 커지자, 석탄이나 철광석 등의 원료와 제품을 멀리 나르기 위해 교통 수단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증기기관을 이용해 배와 기차를 움직이는 증기선과 증기 기관차가 등장했다. 통신 수단에도 혁신이 일어나 미국의 모스 Samuel Morse 는 유선 전신을, 벨 Alexander Graham Bell 은 전화를 발명했다. 교통과 통신 수단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고 생활권과 시장이 확대되었다.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에는 공장이 빽빽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은 '세계의 공장' 이라고 불릴 만큼 굴뚝으로 뒤덮인 곳이 되었다.

 이처럼 공장제 기계공업의 발달로 농업 중심의 세상이 제조업 중심의 2차산업 사회로 변화한 사건을 '산업혁명' 이라고 한다.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풍요로운 시대를 맞았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문제가 사회 곳곳에 등장하기도 했다.

 

31 산업 자본주의 : 자본주의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을까?

 영국 북서부 지방에 위치한 맨체스터. 영국의 대표적인 축구 강팀이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특히 10년여 년 전에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해졌다. 물론 축구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곳은 산업력명이 시작되었던 지역 중 하나이다. 18세기에 면직공업이 발전하면서 맨체스터는 평범한 시골에서 경제력을 갖춘 도시로 탈바꿈했고,. 1830년 대에는 맨체스터와 리버풀을 잇는 최초의 철도가 놓이기도 했다. 이렇게 발달한 자본력을 밑바탕으로 2개의 축구 구단을 둔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산업혁명은 이렇게 특정 도시와 계층에 많은 자본력을 만들어 주었고, 사회의 모습도 변화시켰다. 산업혁명으로 공장제 기계공업 시대가 열리자 자본가들은 직접 공장을 설립하고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기계를 조종하고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지식과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농촌에서 도시로 많은 사람이 몰려왔읜 노동자로 일할 사람은 넘쳐났다. 자본가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높은 임금을 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고용해 상품을 많이 만든 다음, 이를 시장에 판매해 이윤을 남기며 더 큰 부자가 되어 갔다. 자본가들의 경제력과 함께 사회적 힘도 점차 커지기 사작했다. 이처럼 산업혁명 이후 자본가가 공장을 설립해 노동자를 고용하고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주의를 '산업 자본주의' 라고 말한다.

 산업혁명과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상품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자,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풍요의 시대가 왔다.

 물론 산업혁명에 밝은 면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인구가 도시로 모여들면서 주택이나 위생 문제가 심각해졌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열악한 생활을 했던 노동자들은 점차 삶의 질이 떨어졌다. 자료에 따르면 영국 1840년대 맨체스터시티의 상류층의 기대수명이 38세였던 데 비해 노동계급의 기대수명은 17세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은 쓰레기와 재가 쌓인 지역에서 살며 하루 10~16시간씩 일을 해야 했으니 건강과 삶의 질을 챙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열악한 노동, 주거환경에 둘러싸여 있던 노동자 계급에 비해 자본가는 경제적으로 부를 쌓아갔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도 점차 커졌다. 이처럼 빈부격차와 노동문제 외에도 환경오염, 빈민문제 등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어두운 면이 드러났다.

 

32 독점 자본주의 : 변질된 자본주의가 식민지를 찾기 시작한 이유는?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알제리, 리비아, 말리, 수단, 나미비아 등 국경선이 자로 그은 듯 직선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많다. 보통 산맥이나 하천을 기준으로 국경이 나뉘기에 구불구불한 경우가 많은데, 이곳의 국경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선을 그어 나누었다는 인상을 준다. 사실 9~20세기 초까지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점령하며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국경을 나누었기에 이런 모양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뿐 아니라 아메리카, 아시아 등지로 식민지를 늘렸다. 그들은 어째서 식민지를 넓히는데 주력했을까?

 산업혁명 이후 발달한 산업 자본주의는 개인이나 기업의 자유로운 경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시장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면, 수요자와 공급자가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 아래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무한한 자유경쟁은 문제점을 낳았다. 경쟁에서 이긴 소수의 자본가만이 엄청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세기 말에 중화학공업이 발전했다. 공업의 특성상 생산에 필요한 커다란 규모의 기계설비 시설을 갖춘 일부 자본가에게만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큰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자본가와 기업은 점차 힘을 불려 가며 독점기업(한 개의 기업이 시장에 상품을 공급하는 경우) 이 되었다.

 독점기업은 이윤을 늘리기 위해 더 낮은 비용으로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 판매했고, 이러한 경쟁을 통해 다른 작은 기업을 물리쳤다. 결국 가장 낮은 비용으로 최대한 많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 있는 거대 기업과 소수의 대자본가만이 시장에서 살아남았다. 심지어 이러한 거대 공룡 기업들은 서로 힘을 합쳐 독점자본을 만들어냈다. 독점 기업이 지배하는 이 시장에서는 자유로운 경쟁 질서는 커녕 경쟁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가 되어 버렸다. 이처럼 19세기말~20세기 초까지 거대한 소수의 기업이 시장을 독점하는 형태의 자본주의를 '독점 자본주의' 라고 부른다.

 독점자본은 어마어마한 생산량의 상품을 시장에서 쏟아냈다. 이제는 상품을 더 사줄 시장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상품의 원료를 끌어올 곳도 부족했다. 이 때문에 독점자본 세력은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 식민지를 늘리고자 했다. 식민지는 값싸게 원료를 들여올 수 있고, 다 만든 상품을 비싸게 팔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였다.

 강대국의 독점자본 세력들은 식민지를 늘리면서 땅 따먹기 하듯 식민지 쟁탈 경쟁도 벌어졌다. 이렇게 강대국이 힘이 약한 국가들을 침략해 식민지로 삼아 자원을 빼앗고 착취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식민지 쟁탈전이 심각해지면서 이를 바탕으로 제1차 세계대전까지 벌어졌다. 독점 자본주의가 전쟁이라는 비극을 불러온 셈이다.

 

33 대공황 :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역사상 최악의 경기침체는?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미국의 증권거래소가 밀집한 월 스트리트에 절망적인 이야기가 들려왔다. 아침에 주식시장이 열리자마자 주가가 크게 떨어졌다는 소식이었다. 흉흉한 소식에 사람들은 증권거래소에 몰려들었다. 가격이 더 떨어지기 전에 자신이 가진 주식을 모두 팔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닷새 뒤 10월 29일 주식 가격은 다시 23% 정도로 떨어졌으며 140억 달러어치의 주식이 휴지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월가의 붕괴 이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경제가 오랫동안 침체의 늪에 빠졌다. 공포로 느껴질 만큼 심각한 경기침체가 이어진 이 시기를 '경제 대공황' 이라고 부른다. 어째서 갑잡스럽게 주가가 떨어진 것일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큰 전쟁으로 망가진 유럽 대신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10년 동안 미국의 공업 생산량은 90%나 늘어났다. 주식 가격도 크게 치솟았다. 미국의 중산층이 여유자금을 주식에 대거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황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했다. 자본가나 상류층의 부는 늘어난 반면 노동자나 농민은 풍요를 누리지 못했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농산물 가격이 크게 떨어져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충분치 않았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구매력이 부족해 시장의 유효수요 (효과가 있는 수요라는 뜻으로 상품을 살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된 쓸모 있는 수요를 말한다.) 가 부족한 상황이 나타났다. 그 와중에 기업은 늘어난 자본의 힘으로, 상품의 공급을 늘렸다.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 과잉공급으로 기업에는 팔리지 못한 재고가 쌓였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으로 기업이 파산하며 실업자가 늘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파산한 기업의 빚과 돈을 찾으러 온 사람들로 인해 1929~1933년 사이에 무려 9755개 은행이 문을 닫았다.

 대공황의 여파는 전 세계로 금세 퍼졌다. 당시 미국은 세계 1의 경제 대국이었고, 전쟁으로 망가진 유럽의 경제 회복을 돕기 위해 투자와 원조를 많이 한 상태였다. 그런데 미국인들이 투자하고 지원한 돈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하자 유럽 경제도 어려워진 것이다. 경제 대공황은 1930년 내내 이어지며 전 세계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34 뉴딜정책 : 대공황 해결을 위해 정부가 꺼내든 새로운 카드는?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전 세계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이전까지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법칙으로 불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장의 법칙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냥 자연스럽게 해결되도록 놓아 두는 것이다.' 시장에는 보이지 않는 손, 즉 균형을 찾아가는 힘이 있어서 정부가 경제에 굳이 손대지 않아도 자연스레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대공황이 발생하고 몇 년이 지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루스벨트 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뉴딜 New Deal' 이라는 정책을 시작했다. 뉴딜은 카드 게임에서 카드를 바꿔 새롭게 친다는 의미다. 루스벨트 정부는 경제 분야에서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사람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구매력을 갖출 수 있게 도와주면, 소비가 늘어나고 덕분에 기업의 생산도 활발히 이루어지며 일자리가 늘어나는 등 경제가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시행한 사업 중 하나가 테네시강 유역 개발 사업과 같은 대규모 토목 공사였다. 강에 댐을 만들거나 집을 짓고, 공사에 필요한 나무를 베거나 철광석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 백만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었고 그 과정에서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소비가 늘어나고 기업은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루스벨트 정부는 1935년에 사회보장법안을 만들었다. 장애인, 노인, 실업자 등 사회적 약자를 돕는데 핵심이 되는 법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경제적으로 도우면서 그들이 소비를 늘릴 수 있게 해주어 경기를 회복시키려는 의도였다.

 뉴딜정책은 자본주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정부의 개입 없이 굴러오던 자유방임 경제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처음으로 국가가 경제 살리기에 발 벗고 나선 사례이기 때문이다. 뉴딜정책을 실시하면서 미국의 경제는 천천히 제자리를 회복했다. 이후 미국뿐 아니라 자본주의를 선택한 대부분의 정부들은 시장경제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필요할 때마다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혼합경제체제를 따르게 된다.

 

35 수정 자본주의 : 자본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고쳐 쓰는 방법은?

 복지의 천국이라 불리는 북유럽에 위치한 스웨덴, 스웨덴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나라에서 아이를 기르는데 필요한 돈을 보조해 준다. 양육 수당을 주는 것이다. 또한 아이가 대학에 가면 등록금이 무료일 뿐 아니라 나라에서 책이나 용돈 등 필요한 것을 살 만큼의 금액을 지원한다. 이런 국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 삶을 국가에서 책임진다는 복지 정책의 목표를 나타내는 명언이다. 그런데 국가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국민의 인권과 삶의 질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것은 대공황 때부터였다. 이전까지 시장에 모든 걸 맡겨 놓은 상태에서 빈부격차는 심각해진 상태였다. 대공황 직전 미국의 경우 부유한 1%의 사람들이 미국 국내 전체 소득 중 23%를 차지할 정도로 불평등이 심각해진 상태였다. 시장을 자유롭게 놓아 둔 상황의 상태에서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눈덩이처럼 커져 갔다. 독점기업은 덩치를 불려가며 생산량을 늘렸지만 노동자와 서민층은 상품을 살 만한 수입을 손에 쥐지 못했다. 이런 문제점이 쌓여 대공황이 터지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업의 창고 안에는 시장에서 미처 팔리지 못한 빵이 가득 쌓여 있는데, 창고 바깥에는 빵을 살 돈이 없어 굶는 일이 다반사였다.

 대공황이 터지고 뉴딜정책을 실시한 후로, 자본주의를 따르는 나라들은 경기가 출렁거릴 때마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세금과 이자율 등을 적절히 조절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또한 국민들의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복지제도를 실시했다. 사람들의 일자리와 수입이 안정되어야 시장경제도 원활히 굴러가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스웨덴의 복지 정책 역시 수정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시장의 기본이 되는 질서는 그대로 놓아 두고 정부가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시장에 개입하는 경제체제를 '수정 자본주의' 라고 한다.

 수정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정부는 하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 규모가 예전보다 더 커졌다. 자유방임주의 시대의 정부가 국방이나 치안 등에만 힘쓴 '최소한의 정부' 였다면 이제 수정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그 외에도 교육, 복지, 경제제도 등 국가의 일을 맡아 하는 '큰 정부', 복지국가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36 석유파동 : 주유소에 기름이 모자랐던 시기가 있었다?

 1970년대 전 세계는 두 차례의 경제적 위기를 맞았다. 두 사건 모두 석육값이 치솟으며 벌어진 일이다. 석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에너지 자원이다. 각종 연료로 쓰일 뿐 아니라 치약이나 옷처럼 일상 생활용품을 만들 때도 중요한 원재료다. 1980년대 이전까지 석유자원은 주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중동 아랍 국가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주변 이슬람 국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해주며 대결 구도가 만들어지자, 아랍의 석유 생산국 모임인 석유수출기구OPEC는 1973년 10월 16일 일방적으로 석유 가격을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17%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석유라는 자원을 하나의 무기처럼 사용하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전 세계에 발휘한 것이다. 다음 해가 되자 실제로 원유 가격은 급격히 치솟아 거의 네 배가 되었다. 이처럼 석윳값이 급격히 올라가며 전 세계에 경제적 위기와 혼란이 왔는데, 이 사건을 '석유파동 오일쇼크 Oil shock' 라고 한다.

 원유 가격이 오르자 석유로 만드는 모든 상품의 가격이 일제히 오르면서 전 세계에 심각한 물가상승이 이어졌다. 전 세계 곳곳 주요소 앞에 기름을 구하기 위해 차들이 줄을 섰고, 상품 가격이 비싸졌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제1차 석유파동이 진정된 후, 1978~1980년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 정치적 불안정이 이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감산 (생산량을 줄이는 것) 을 결정했다. 석유 생산량이 어마어마하게 줄어들며 유가는 1년 사이 세 배까지 올랐다. 한국 역시 석유 파동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었다. 특히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19800년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1.7%까지 떨어졌다. 당시 우리나라는 산업구조를 경공업에서 석유가 많이 필요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바꾸던 시기였기에 더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석유파동으로 물가가 상승하면서 경기까지 나빠지는 상황 (스태그플레이션) 이 나타났다. 정부도 손쓰기 힘든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정부가 경제에 손을 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라고 말이지요. 경제에 대한 정부의 불필요한 개입을 줄여야 한다는 경제학자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37 신자유주의 : '철의 여인' 대처 총리는 왜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을까?

 마거릿 대처 Margaret Thatcher 는 유럽에서 최초로 여성 총리가 된 인문로, 1979년 당선 이후 연이어 세 번이나 그 자리를 지켰다. 대처를 이야기할 때 꼭 붙는 말 중 하나가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다. 강한 지도력으로 이전과 다른 정치·경제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3년 대처가 사망했을 때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과거 그가 실시한 정책이 남긴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그녀가 추구한 방향이 어떠했기에 이처럼 찬반이 갈리는걸까?

 경제학에서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는 '시장에 국가와 정부가 얼마나 개입하느냐' 입니다. 대처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영국 및 세계자본주의 국가들은 수정 자본주의의 흐름에 따라 국가가 경제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국민생활에 중요한 전기, 철도, 수도 분야 등은 국가가 운영하는 공기업이 도맡아 운영했고, 국민에게 걷은 세금을 바탕으로 다양한 복지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국가의 역할이 커지면서 문제도 생겼다. 과도한 복지제도 때문에 돈이 많이 들었고, 국민이 내는 세금이 늘어났다. 직장에서 일을 하기보다 나라에서 실업 수당을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의도적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부작용을 '복지병'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서 총리가 되니 대처는 과감한 정책을 실시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사회복지에 드는 지출을 대폭 줄였다. 경쟁력이 없다고 여겨지던 탄광 사업을 정리하기도 했다. 대처의 이러한 정책은 신자유주의라는 경제학의 흐름에 따른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말그대로 새로운 新 자유주의, 즉 애덤스미스 Adam smith의 자유방임주의에 가깝게 돌아가자는 주장이다. 경제 분야에서 정부의 지나친 간섭을 내려놓고, 정부의 무리한 복지정책과 시장에 대한 지나친 개입을 줄여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따라 대처 정부뿐 아니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역시 복지 예산을 줄이고, 부자나 대기업의 세금을 줄여 주며 시장의 활발한 움직임을 꾀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기업 경쟁이 활성화되고, 기업들은 임금과 원료비가 저렴한 해외로 진출을 서둘렀다. 국경을 넘어 자본이나 노동력이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처럼 이어지는 세계화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자유로운 경쟁이 강조되면서 국가 간·개인 간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대처 총리의 신자유주의 정책 역시 상위 1%를 위한 정책이며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심각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철의 여인에 대한 찬사와 비판의 신자유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드러내는 셈이다.

 

38 세계 금융위기 : 금융시장을 덮친 미국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위기는?

 2011년 가을, 윌 스트리트에서 시민들이 'Occupy Wall Street (윌 스트리트를 점거하라) ' 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진행했다. 윌 스트리트는 미국의 금융회사와 주식회사가 몰려 있는 세계 금융의 중심 지역이다. 왜 시민들은 정치적 갈등 지역도 아닌 금융 중심지, 윌 스트리트를 점검하자며 거리로 나섰을까? 시위의 뒷배경에는 세계금융위기라는 사건이 있었다.

 '세계 금융위기 Financial Crisis of 2007~2009' 는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대규모 경기침체와 금융회사의 파산 사태를 말한다. 2000년대 이후 미국은 경기가 나빠졌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준금리 (국가 전체 이자율의 기준이 되는 금리) 를 내렸다. 이자율이 낮아져 대출 부담이 줄어들자 사람들은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려 부동산에 투자를 시작했다. 이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터무니없이 오르기 시작했고, 여기에 더해 금융회사들은 더 많은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신용등급이 낮은 데다가 딱히 재산이 없는 저소득층에까지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주었다. 심지어 가진 돈이 전혀 없어도 집값의 100% 수준까지 대출을 해주기도 했다. 이처럼 저소득층에게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주는 상품을 미국에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Subprime Mortgageoan Loan 이라고 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덕분에 2005년 한 해 동안 미국의 집값이 평균 52%까지 급격하게 치솟았다.

 결국 미국 중앙은행은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2004년부터 다시 이자율을 올렸고 비싸진 이자로 돈을 갚을 능력이 없던 저소득층은 파산했다. 그들에게 빌려 준 돈을 받지 못하게 된 은행과 금융회사 역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 대행 금융회사였던 리먼 브러더스 Lehman Brothers가 무너지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뒤이어 다른 투자 은행들도 줄줄이 파산하거나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미국 정부는 결국 기업의 파산을 막기 위해 총 7,000억 원의 자금을 지원해 주는 구제금융정책을 실시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2009년 한 금융회사는 직원들에게 200억 원이라는 엄청난 보너스를 주어 사회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금융회사의 무책임한 행동과 정부의 무분별한 구제금융정책에 화가 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며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미국의 경기침체와 실업률 상승은 전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미국 주식에 투자한 외국 투자자들과 미국의 투자를 받았던 외국 기업들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국 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등 세계의 주가도 하락했다. 결국 2007~2009년까지 세계적인 경기불황이 이어졌는데 이를 세계 금융위기라고 부른다.

 

39 일본의 버블경제 : 일본의 빛나는 전성 시대는 어떻게 끝났을까?

 네온사인이 빛나는 일본의 화려한 밤거리를 보여 주는 사진은 놀랍게도 1980년 대의 모습이다. 사진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약 40년 전 일본 경제는 장밋빛 시대를 맞고 있었다. 무역에서 항상 흑자를 시록해 미국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미국의 견제 때문에 경기가 나빠질까 우려해 중요한 조치를 내렸다. 1985년 5%였던 금리 (이자율)를 1987년 초까지 2.5%호 내린 것이다. 이자율이 내려가자 기업들은 너도나도 은행에서 돈을 빌려 사업 규모를 늘렸고 다양한 분야에 투자를 시작했다. 개인도 대출을 통해 소비와 투자를 늘렸다. 덕분에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다. 당시 도쿄 번화가 지역의 땅을 전부 팔면 미국 캘리포니아주 전체를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지만 당시 자산 가격 상승은 기술 개발이나 생산 능력의 발전 덕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맥주를 잔에 따르면 그 위에 거품이 끼듯, 실질적인 경제성장이 아니라 자산 가격에 거품이 낀 것에 불과했다. 이처럼 경제가 생산 능력이나 실물 부분의 성장보다 과대평가되었을 때, 거품이 끼듯 자산 가치가 높아지는 상황을 '버블경제' 라고 한다. 버블경제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가격이 집 한 채만큼 비싸졌던 '튤립버블' 이라는 사건이 있었고,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IT 산업에 대한 전망이 밝아져 관련 주식 가격이 엄청나게 오른 '닷컴버블' 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버블은 맥주 거품이 꺼지듯 언젠가는 사라진다. 부동산과 주식 가격 상승이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지자 이를 걱정한 일본 정부는 1989년부터 대출을 규제하고 금리를 2.5%에서 6%까지 올렸다. 그와 동시에 일본 경제는 빠르게 무너졌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자산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갚아야 할 대출 이자가 늘어나자 집과 주식을 팔아 치웠다. 1991년 이후 일본의 땅값은 계속 떨어져 주거용토지의 경우 그가격이 원래의 50%대까지 추락했다. 일본인들은 경기침체에 소비 역시 줄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기업에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대출 이자가 늘어 안 그래도 어려웠던 기업은 상품이 팔리지 않자 부도가 났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이처럼 거품 경제가 꺼지면서 일본에는 10년 이상 이어지는 기나긴 경기침체가 시작되었다.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장기 불황 시기를 '잃어버린 10년' 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40 3저 호황 : 우리나라 경제의 최대 황금기는 언제였을까?

 "근검절약의 일벌레 한국이 소비 풍조로 치닫고 있다."

 

1989년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 The Washington Post》지는 한국의 경제 상황을 이처럼 묘사했다.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 이라 불릴 정도로 상황이 좋았다. 100만 대의 자동차가 보급되며 '마이카' 시대가 열렸고, 처음으로 컬러 TV가 많은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호황기가 우리나라에 찾아왔을까?

 198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중동산 석유 가격이 올라 경제에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석윳값이 올라가니 물가가 높아졌고, 이 때문에 우리나라 상품도 비싸져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반전이 일어났다. 세계적으로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라는 3저의 분위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1980년대 미국 역시 석유 가격이 올라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이라는 강력한 수출 라이벌이 등장해 무역적자도 심각했다. 이에 미국은 여러 나라와 합의해 플라자합의 (Plaza Accord, 1985) 라는 조치를 취한다, 일본 엔화의 가치를 높이고, 미국 달러화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낮추는 것 (저달러) 이 주요 내용이었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수입되는 상품의 가격을 올려 라이벌인 일본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일본 엔화가 비싸지며 상대적으로 저렴한 우리나라의 상품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 덕분에 무역에서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더불어 저유가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석유파동에 충격을 받은 여러 나라는 중동산 석유 의존도를 낮추려 노력했고 덕분에 알래스카, 북해 등에서 새로운 유전이 개발되었다. 생산지가 많아지면서 전 세계 석유 공급이 늘어나 석유 가격이 떨어졌고, 우리나라처럼 석유를 소비하는 나라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석유로 만드는 상품의 생산비가 떨어지니 그동안 올라가던 물가도 안정되었다. 유가가 떨어지자 여유가 생긴 한국 정부는 금리를 낮췄다 (저금리) . 금리가 내려가면 사람들은 저축을 줄이고 소비를 늘린다. 덕분에 시중에 돈이 활발히 돌아 경제가 활기를 띄었다.

 3저 호황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은 매년 10% 이상 증가했다. 다시 돌아오기 힘든 풍요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41 1997년 외환위기 : 한국 경제의 역사를 뒤바꾼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을까?

 1997년 11월 22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나라의 경제 부총리가 세계 경제 안정을 위해 일하는 국제기구인 IMF (국제통화기금) 에 자금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였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국민은 깜짝 놀랐다.

 '1997년 위환위기'는 우리나라 경제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다.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 (국민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면 기업이나 국가에 자금을 빌려주는 것)을 신청해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IMF 외환위기' 라고 부르기도 한다. IMF에 지원을 요청할 당시 우리나라가 외국에 진 빚은 1,500억 달러가 넘었는데, 외환보유고 (비상시에 대비해 갖고 있는 외환보유액)에 있는 외화는 채 40억 달러도 되지 않았다. 1980~1990년대 초까지 눈부신 발전을 이어가던 한국은 어째서 이런 위기에 빠졌을까?

 당시 한국의 많은 기업은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늘리며 몸집을 불리기 위한 사업을 펼쳤다. 자연스럽게 해외에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정치권과 기업이 부정한 방법으로 기업에 과도한 대출이나 투자를 부추기도 했다. 은행이나 투자회사가 해외에서 자금을 1년 이하의 짧은 기간으로 빌려 온 다음, 기업에 높은 금리를 받고 대출을 해주었다.

 그런 와중 1997년 여름 이후,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상황이 줄줄이 나빠졌고 한국도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위기의 조짐이 보이자 외국의 금융회사는 우리나라에 빌려주었던 돈을 빼서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악조건이 이어지며 1997년 11월에 외한보유액이 바닥났고, 심각한 위기 속에서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IMF는 자금을 빌려주는 대신 우리나라의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기업의 구조를 바꾸라고 요청했다. 또한 금리를 올릴 것을 요청했다. 대출 금리가 오르자 IMF 체제가 시작된 1997년 12월 한 달 동안 서울 지역에서만 무려 1226개의 기업이 부도를 내며 쓰러졌다. IMF 구제금융을 받는 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기업 30개 중 17개가 무너질 정도였으니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살아남은 기업들도 각종 퇴직제도로 직원을 대규모 해고하며 인력을 줄였고 실업자 숫자도 늘어났다.

 민간에서는 국민이 가지고 있는 달러를 은행에 예금하거나 금 모으기 운동을 하며 힘을 합쳤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한국은 외환위기의 그림자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했다. 2000년 12월에 마침내 외환위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는 대통령의 공식 발표가 있었고, 2001년 8월에는 IMF에서 빌린 195억 달러를 전액 조기 상환하면서 마침내 IMF 체제에서 졸업했다.

 우리나라는 예상보다 빠르게 외환위기를 벗어났지만 그 후유증도 컸다. 많은 회사가 문을 닫거나 외국 기업에 넘어가면서 실업자가 크게 늘어났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크게 늘어났고, 노동자를 해고하는 게 쉬워지면서 고용 안정이 떨어졌다. 해고가 쉬워지고 정규직 대신 비정규직 노동자가 크게 늘어나며 고용이 불안정해졌고, 이 과정에서 중산층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무너졌다. 이처럼 IMF는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빈부격차를 심각해지는 문제를 낳았다.

 

경제로 세상 읽기 I : 어두운 미래를 다룬 디스토피아 영화가 많은 이유는? - 4차 산업혁명과 미래

 미래 이야기를 다루는 2013년 영화 <엘리시움>, 상위 1%의 부자들은 피폐해진 지구를 버리고 아름다운 우주 도시 엘리시움으로 옮겨가 살고, 지구에 남은 빈민층은 지저분한 환경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간다. 백혈병이나 암, 심각한 부상까지 고칠 수 있는 메디컬 머신이 존재하지만, 이 과학기술을 누릴 수 있는건 엘리시움에 사는 엘리트 계층뿐이다.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자연스레 궁금증이 생긴다. 우리가 맞이할 미래가 정말 영화와 같을까?

 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의 삶을 바꾸고 있는 중이다. 3D 프린터로 제작된 차량이 생산되고, 인체 삽입형 휴대폰이 등장하고, 미국의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10%가 자율주행 자동차가 되는 세상. 공상과학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경제포럼이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후, 2025년 정도에 일어날 변화를 예측한 내용이다. 특히 4차산업혁명을 통해 인공지능과 로봇이 발달하고 사물까지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인간은 노동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엘리시움>처럼 미래사회에 심각해질 빈부격차와 계급문제 등을 다룬 디스토피아 영화가 많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동전의 양면처럼 부작용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측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의 진행으로 예측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일자리 감소다. 인공지능과 로봇 때문에 단순 노동직뿐 아니라 전문직 일자리까지도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텔레마케터, 스포츠 심판, 회셰사, 택시 기사, 회계사, 약사, 세무사 등의 직업이 곧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으면 소득도 줄어든다. 특히 사무직이나 관리직 등이 사라지면서 중산층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물론 몇 안 되는 소수의 데이터 전문가나 인공지능 설계자 등은 많은 돈을 벌겠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소수다. 사회는 소수 전문가 상위층과 저숙련 노동자로 이루어진 대다수 하위층으로 나뉠 가능성이 높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빈부격차와 양극화 문제. 디스토피아 영화가 다루는 미래는 이런 문제가 심각해졌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풍경이다. 어두운 미래를 현실로 만들지 않기 위해 AI나 인공지능의 발다이 가져올 부작용을 예측하고, 일자리 감소나 양극화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경제로 세상 읽기 II : 코로나19 이후 정부에서는 왜 재난지원금을 주었을까? - 재난지원금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조선 시대의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대왕. 세종대왕이 왕으로 있었던 1434~1435년 사이에 함경도에 큰 전염병이 돌았다. 전염병으로 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은 왕은 백성들에게 면포5000필을 급히 나눠 주었다. 세종대왕의 특별한 일화가 아니더라도 조선 시대에는 전염병이나 흉년,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국민을 돕는 제도가 있었다. 재난으로 살림이 어려워진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주는 견감蠲減이라는 제도였다.

 비슷한 정책이 21세기에도 등장했다. 2020년, 코로나 19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대한민국 정부는 긴급재난지원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전 국민에 제 1차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데 약 14조 가량을 썻다.

 조선 시대의 견감 제도처럼 국민을 돕는다는 '베품'의 의도로 정부가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일까? 물론 재난지원금에는 코로나로 생계가 어려워진 국민을 돕겠다는 의지가 숨어 있다. 그러나 재난지원금을 주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코로나19로 인해 학원에 가지 못하는 학생이 늘어나면 학원을 운영하는 이들이 어려워지고, 손님이 줄어들 경우 시장에서 일하는 상인들의 소득이 줄어든다. 자영업자들의 수입이 감소하면, 이들의 소비도 줄면서 기업의 상품이 팔리지 않게 되고 상품을 만들어 파는 기업에게도 타격이 온다. 즉 소비가 줄어들게 되면 모든 산업에 줄지어 나쁜 영향을 끼쳐 국가의 경제 사정이 금세 나빠질 수 있다. 소비를 먼저 늘려야 나라 경제도 살아날 가능성이 커지기에 국가는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비슷한 정책을 실시했다. 미국은 2020년 성인에게 최대 1,200달러, 일본은 1인당 10만엔 (약 100만원) 등을 국민들에게 재난지원금으로 나누어준 바 있다.

 재난지원금은 소비를 늘려 경기를 살렸을까? 재난지원금을 지급 후 그 사용처인 소상공인들의 매출이 늘어났고, 1차 재난지원금이 소비를 30% 정도 늘렸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나머지 70%는 빚을 갚거나 저축을 해서 그 효과가 충분치 않았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많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2차~5차 국가재난지원금은 소득이나 업종을 기준으로 골라낸 도와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재난지원금의 대상이나 효과에 대한 협의가 앞으로 꾸준히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