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2주차 금리 공부
금리를 왜 알아야 할까?
금리는 돈에 '돈값' 을 매기는 것
내 예적금 이자가 왜 이렇게 저렴한 거죠?
기준이 되는 금리. 그거 대체 누가, 왜 정하는건데?
무역과 금리, 거래와 돈값의 상관관계
3주차 환율 공부
환율을 왜 알아야 할까?
환율은 무역할 때 필요한 외국 돈의 '소비자 권장가격'
환율에 영향을 미치는 '힘센 나라' 의 돈, 기축통화
돈을 사고파는 시장이 있다고?
아시아 외환위기의 시작은 미국의 금리 인상이었다.
우리나라가 겪은 IMF 외환위기의 전모
전쟁으로 돈을 번 미국, '기축통화국' 이 되다
미국과 중국의 기축통화를 둘러싼 왕좌의 게임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우리나라
4주차 유가 공부
유가를 왜 알아야 할까?
유가, 세상 모든 물가를 움직이다.
유가의 지정학 : 국제 역학에 따라 달라지는 가격
유가. 세계경제의 판을 흔들다
개인이 원유를 거래하는 신박한 방법
결론
에필로그
미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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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차 금리 공부
금리를 왜 알아야 할까?
금융경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금리를 살펴본다.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다.
① 금리는 돈의 사용료로, 원금에 붙는 이자를 뜻한다.
② 이자의 종류도 계산법도 아주 여러 가지다.
③ 이자를 계산할 때 중요한 요소는 기회비용이다.
④ 그런데 요새 돈의 사용료는 아주 낮아진 편이고,
⑤ 어쩌다가, 왜 저금리 시대가 찾아왔는지 이해하려면 경제성장과 인플레이션을 이해해야 한다.
⑥ 그러려면 돈에도 수요공급 법칙이 적용되며, 기축통화의 역할을 하는 돈이 따로 생긴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챕터를 통해,
ⓐ 돈의 기회비용이란 무엇인지
ⓑ 경제성장과 인플레이션이 금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 기축통화는 대체 무엇이고, 왜 태어났는지
ⓓ 돈에 수요공급 법칙은 어떻게 적용되는지
ⓔ 금리가 무역 (환율) 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통해 쉽고 재밌게 알아볼 것이다.
금리는 돈에 '돈값' 을 매기는 것
'금리' 란 무엇일까? 금리는 다른 말로 '이자' 라고 라고, 또 '이율' 이라고 한다. 셋 다 '돈의 값' 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햄버거 세트는 7,000원, 신발은 10만 원, 이런 건 물건의 값을 나타낸다. 그런데 돈의 값이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이제부터 금리를 계산하는 법을 차례로 알아볼 것이다. 금리 계산법에 등장하는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건 기회비용이다.
로또 당첨으로 생각해보는 기회비용
금리의 본질적인 의미는 빌려준 돈의 '기회비용' 이다. 기회비용은 일명 '선택의 대가' 다. 내가 이걸 선택함으로써 선택지에서 밀려난 다른 하나가 기회비용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렸다고 하자. 내가 안 빌렸으면 원래는 돈 주인이 그 돈 갖고 할 수 있었던 일의 값어치를 기회비용이라고 한다. 그 돈으로 저축을 하려고 했다면 저축이 기회비용이고, 영화를 보려고 했다면 영화가 기회비용이다.
이를 기억하며서 다음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다음은 로또에 당첨된 운 좋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로또 1등이 많이 배출된 곳' 이라는 현수막이 붙은 가게에서 우연히 지나던 사회초년생 A는 전날 밤 좋은 꿈을 꿨기에 로또를 샀다. 두근두근하며 토요일 밤을 기다렸는데, 세상에나! 로또 1등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돈도 보게 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라 너무 신기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래 A는 당첨금을 은행에 넣어두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식투자를 해서 불려야 할지, 이자가 적더라도 예금에 묻어둘지 고민하다가 부모님이라면 현명한 조언을 해주실 것 같아 이야기를 꺼냈는데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지 뭐에요. 며칠 전 벌어진 일을 떠올려봅니다.
당첨자A : 로또 1등 당첨!!
사람들 : 당첨되셨다면서요, 기부 좀 해주세요.
가족들 : 10억 생겼다면서? 엄마, 아빠의 노후 자금, 동생 결혼 자금으로 약간만...
당첨자A : 공짜로 생긴 돈인데 남에게 조금 주는 게 왜 이렇게 기분 나쁘고 아깝지?
A가 로또를 사는데 들인 돈은 단돈 5,000원이다. 커피 한 잔 값이다. 5,000원 내고 10억 원이나 받은건데 남 주기가 정말 아깝다. 기부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도 멋진 일이고, 부모님 노후 준비는 원래 도울 생각이었다. 동생이 결혼하는 데 보태줄 수 있게 됐으니 그 역시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A는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 왜일까? 아무런 대가 없이 굴러들어온 공돈, 좋은 일에 쓰자는데 기분이 나쁜건 이상하거든요. 어려운 사람 돕기는 그렇다 치고, 가족한테 쓰는건데...
A는 가만히 학창시절을 떠올린다.
친구 : 야, 니꺼 노트 필기 좀 빌려주라.
A : 너 빌려주면 나는 그동안 뭐 보고 공부해?
친구 : 너는 원래 이 과목 잘했으니까 공부 많이 안 해도 되잖아. 내일 하루만 빌려줘. 응?
A : 오늘 끝나고 떡볶이 사주면.
A와 친구는 '딜!' 을 외치며 흔쾌히 노트와 떡볶이를 교환했다. 사실 그냥 빌려줄 수도 있지만 어차피 빌려주는거 떡볶이로 퉁치자고 생각한 거다. 친구도 마찬가지다. 공부 잘하는 A의 노트는 빌려달라는 사람이 워낙 많다.
'친구가 떡볶이를 안 사줘도 빌려줬을까?' A는 생각해봅니다. 빌려줬을 것 같긴 하지만 별로 친하지 않은 다른 친구 B가 소고기를 사준다고 했으면 누구에게 빌려줬을지 고민해본다. 우정을 소고기에 팔아넘긴다는 생각이 들지만 소고기라니, 하면서 마치 어제 일처럼 고민한다. 그러다가 혼자 민망해져서 A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 야! 나도 공부해야 하는데 빌려주는 거라고! " A의 노트 값은 떡볶이나 소고기가 아니다. 노트르 아예 파는 것도 아니다. A의 노트 값은 그 노트로 '하루 동안 공부를 못하는 대가' 다. 바로 기회비용이다.
로또가 은행 대출금이라면
로또 당첨 금액도 기회비용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을 이런 것이다.
사람들 : 당첨되셨다면서요, ( 그 돈으로 집도 사지 말고 차도 바꾸지 말고 맛있는 것도 덜 사먹고 여행도 가지 말고 ) 기부 좀 해주세요.
가족들 : 10억 생겼다면서? ( 그 돈으로 집도 사지 말고 차도 바꾸지 말고 맛있는 것도 덜 사먹고 여행도 가지 말고 ) 엄마, 아빠의 노후 자금, 동생 결혼 자금으로 약간만...
그 돈 갖고 하고 싶은거, 할 수 있는거 다 포기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금리는 내가 로또 당첨금을 갖고 할 수도 있었던 퇴사할 수 있는 자유, 계약할 수도 있었던 전셋집, 새 차, 내가 먹을 수도 있었던 굉장히 비싼 요리 등에 대한 대가다.
이제 이 로또 당첨금을 은행 대출금으로 바꿔볼 것이다. 사람들은 은행에 예·적금을 한다. 은행에 돈을 그냥 금고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한 곳에 다시 빌려준다. 개개인이 현금을 10억 원씩 갖고 있긴 어렵지만, 100명이 1,000만 원씩만 저금해도 10억 원이 된다. 100명보다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은행을 이용할 테니 100억 원, 1,000억 원이 필요한 곳에선 은행에게 문의를 한다.
누가 그렇게 돈이 많이 필요할까? 기업이다. 공장 부지가 필요하다거나, 비싼 정밀기계를 몇 대 사야 한다거나, 갑자기 어려워져서 직원들 월급을 대출 받아 줘야 한다거나 등 기업에게 돈이 필요한 일이 엄청 많다. 그런데 은행에서 공짜로 돈을 빌려줄까? 당연히 아니다.
고객 : 이 돈으로 마라탕도 먹을 수 있었고, 지하철 대신 택시를 탈 수도 있었는데 은행씨에게 맡기는 거에요. 어떻게 보상해줄거에요?
은행 : 이자를 드려야죠, 고객님
고객 : 그러셔야죠. 은행씨는 나 같은 사람들의 돈 모아서 더 비싼 이자 받고 기업에 빌려줄테니 말이에요.
은행 : 예금금리하고 대출금리는 또 다른 법이죠. 허허허. 은행도 행원 월급은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업 사장님과 은행의 대화를 볼까요?
사장님 : 나 같은 사장들은 회사를 굴리려면 항상 돈이 필요하다니까요.
은행 : 사장님, 아까 다른 분도 다녀가셨어요. 그 분 회사가 수익은 더 좋은데··· 안정성이 좀 떨어지는 것 같아 사장님께 돈을 빌려드리기로 했어요사장님 : 감사합니다. 그런데 안정성이 떨어진다는게···
은행 : 그 분 회사는 시작한 지 이제 3년이라 아직 불안정하거든요. 반면 사장님 회사는 크게 성장하진 않아도 벌써 20년이나 유지하셨고···. 사장님 회사보다 돈 돌려받기가 훨씬 나을 수도 있죠. 그래도 20년 업력 믿고 사장님께 빌려드리는 거에요.
돈을 빌리려는 사람은 돈을 빌려주는 사람에게 이렇게 원금에 더해 돈에 대한 값을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돈에 대한 값을 얼마만큼 지불할지 결정하는 것이 바로 금리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내 돈을 그냥 줄 수도 있는 가족이나 친구와 달리 시장에서는 돈을 '상품' 이라고 본다. 상품을 대여해줬는데 빌려간 사람이 돌려주지 않으면 장사하는 입장에서는 큰 손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은행은 빌려가는 사람이 돈을 떼 먹을 확률, 빌리는 기간, 빌리는 목적, 물가상승률과 기회비용까지 모두 고려해서 돈값을, 즉 금리를 받게 된다.
아주 저렴해진 요새 금리
요새 은행들의 예금이율은 연 1%를 왔다갔다한다. A가 로또 당첨금 10억 원을 넣어두면 대략 1년에 이자로 1,000만 원을 받는다. 여기서 세금을 생각을 안 했다. 일해서 번 돈이 아닌 복권에 당첨돼서 얻은 불로소득이니 세금 33%를 떼고 나면 받은 금액은 6억 7,000만 원이다. 예금을 해두면 1년에 670만 원을 받겠다. 매년 약 700만 원이 생기는 건 기쁘지만 평생 이자만으로 놀고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A는 시무룩해졌다.
'아니, 내 소중한 돈값이 이렇게 싸단 말이야?'
안타깝지만 그렇다. 2005년에 한국은행에서 발간한 《숫자로 보는 광복 60년》에 보면 이런 통계가 나온다.
금리 변동 추이 | |||||
(단위 : % ) | |||||
1970 | 1980 | 1990 | 2000 | 2005 상반기 | |
예금 금리 (연) | 22.8 | 18.6 | 10.0 | 7.01 | 3.46 |
출처 : 『오늘 배워 내일 써먹는 경제상식』, 2장 p84 |
2017년 은행연합회가 계산한 1년 만기 정기예금금리는 1.48%, 2020엔 실질적으로 0%라며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만약 1970년에 로또가 당첨됐더라면 약 10년 정도는 매년 이자만으로 거의 1억 5,000만 원이 나오는 '억대 연봉자' 가 됐을 텐데 말이다. 물론 물가상승률은 생각하지 않은 과장된 상상이다. 그때는 월급도 물가도 로또 당첨금액도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아무튼 A는 괜히 억울하다. '1970년 이전에 나는 왜 안 태어나고 지금 태어나가지고···.' 벼락 맞을 확률의 로또 당첨금까지 됐는데 직장은 여전히 다녀야 할 것 같네요. 놀면서 세계 일주를 하려던 꿈은 깨졌습니다. A는 어디다가 말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네요
'왜?! 왜 이자율이 계속 떨어져 온 건데?! 요즘은 왜 돈값이 싼건데?!'
왜일까?
내 예적금 이자가 왜 이렇게 저렴한 거죠?
금리란 돈의 값이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 돈값은 떨어져왔다. 다시 말해 돈의 가치가 계속해서 저렴해진 것이다. 예전에 기본요금 1,000원을 주고 탈 수 있었던 택시를 이제는 3,000원 넘게 주고 타야 한다.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3배 정도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게 된 셈이다.
월급도 마찬가지다. 2007년 대기업 GS칼텍스의 신입 사원 연봉 3,500만 원이었는데 2019년에는 4,500만 원으로 올랐다. ( 잡코리아 기업정보 기분). 사람 한 명을 뽑는 값이 12년 만에 1,000만 원, 약 1.3배 올라버렸다. 이걸 다른 말로는 '물가가 올랐다' 고도 한다. 인플레이션이다.
돈값과 물건값은 서로 양팔저울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 햄버거와 콜라 세트가 1,000원일 때는 2개 다 먹을 수 있었다. 햄버거와 콜라 세트가 2,000원 으로 올랐을 때 1,000원을 내면 햄버거 밖에 못 먹는다.
물건 값이 올라가면 돈을 더 많이 내야 하니까 돈값은 떨어지는 것이다. 물건 값이 떨어지면 같은 돈으로 물건을 더 많이 살 수 있으니까 돈의 가치가 올라가는거다. 그간 물건값, 즉 물가가 올랐다. 그럼 물가는 왜 이렇게 오른걸까?
지금 돈값이 왜 이렇게 낮은지를 이해하려면 2가지 개념을 알아야 한다.
① 경제성장의 개념
② 화폐의 수요공급 법칙
A는 머리를 쥐어뜯습니다. 그냥 로또 당첨금으로 놀고먹고 싶을 뿐인데 무슨 경제성장까지 이해해야 하냐고 투덜거리네요. 하지만 책값을 냈으니 마저 듣도록 하는 것이 좋다.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 돈은 낸 대가로 지식을 얻어가지만, 여기서 덮으면 책값을 버리는 셈이 된다. 게다가 만약 당첨금을 예금한다면 매달 나오게 되는 이자 800만 원으로 재테크를 해야할 때 꼭 이해하고 넘어갈 내용이다.
돈이 돌면, 경제가 성장합니다
물가는 왜 오르는걸까? 한국 경제가 꾸준히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한국에는 재래식 화장실 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집 안에 수세식 변기를 설치하게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궁이 대신 가스레인지가 등장했고, 고무신 대신 인조가죽으로 된 운동화도 나왔다.
물건이 귀하던 시절이라 뭘 만들어도 상품이 잘 팔린다. 수세식, 변기, 화장실에 깔 타일, 수도꼭지, 고무호스, 거울, 칫솔, 비누, 성냥, 운동화··· 무슨 상품을 내놔도 새롭고 이전보다 생활을 편리하게 해준다. 회사는 돈을 벌고, 돈을 벌었으니 직원들 연봉도 조금 올려준다. 사장님은 앞으로 직원 월급을 더 많이 줘야 하니까 잘 팔리는 물건을 좀 올려서 이익을 더 많이 남기려고 한다.
모두들 월급을 이전보다 조금씩 더 많이 받으니 물건 값이 더 올라도 별 고민없이 구매한다. 그렇게 물건이 잘 팔리니 월급이 또 오른다. 그럼 사장님은 그 월급을 주려고 물건 값을 또 올려 판다. 전국의 회사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계속 벌어진다.
경제 성장의 선순환 : 1. 기술의 발전 2. 생산성 향상 (생산량 증가) 3. 부의 증가 (매출액 상승) 4. 월급상승 5. 수요증가 (물건을 더 많이 삼) 6. 물가가 오르고, 세금이 더 많이 걷힘 7. 기술 발전을 위한 투자
가격이든 월급이든 계속 돈의 액수가 늘어나고 있다. 지속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런 순환 과정을 거칠 때마다 경제규모 (GDP)가 커진다. 그러니 상품도 더 많이 만들고 값도 올랐으니 총 매출액 (상품 개수 X 상품 가격)이 훨씬 늘어났다. 이게 바로 경제 성장이다.
물가가 오르지 않은 경제 성장은 없다. 적절한 인플레이션이 꼭 필요한 이유다. 물론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는 매년 다르다. 그걸 계산하는 사람득ㄹ이 정부의 재무 관료들과 경제학자들이다.
경제침체의 신호, 디플레이션
그런데 물가가 너무 오르면 힘들다. 모든 물건이 잘 팔리는건 아니니 말이다. 보통 잘 팔리는 물건만 잘 팔리고 안 팔리는 물건은 안 팔리니까 말이다. 잘 안 팔리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잘 팔리는 물건을 사려고 하면 내 월급은 안 오르는데 물가만 오른다고 느끼게 된다. 이제까지 '사는 게 팍팍하다' 는 의미는 대충 그런 뜻이었다. 그런데 국가에서 '물가성장률이 0%다, 실질적으로 마이너스다' 라고 발표하는 건 조금 과장을 섞어서 이야기하면 물건이 잘 팔리는 회사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전반적인 경기침체의 신호다. 이렇게 물가가 계속 역성장을 하는 것이 디플레이션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가 간 무역을 역사상 가장 활발하게 시작한 이후 세계경제의 기본 상태는 대체적으로 인플레이션이었다. 디플레이션은 물건이 안 팔리니까 (수요가 무진하니까) 수요공급 법칙에 따라 공급이 남아돌아 물건 값이 떨어지는 것이다. 돈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예전엔 100원에 주고 샀던 파전이 50원만 줘도 살 수 있다. 그래서 100원을 내면 파전과 막걸리를 모두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왜 세계경제가 그간 인플레이션 상태였을까? 최근 100년간 기술의 발전으로 좋은 물건이 발명됐다는 걸 첫 번째로 꼽을 수 있고 두 번째는 세계 시민 모두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쓰시던 물건을 물려받아 망가질 때까지 사용하고 절대로 새 물건은 사지 않은, 경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아가는 윤리적인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디플레이션의 사례를 들자면 고령화가 심각해진 일본을 꼽을 수 있다. 너무 나이가 들어 신체능력이 떨어지면 과도한 소비는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노인들이 한 국가에서 돌고 있는 돈을 많이 보유하고 그 노인들의 비중이 높으면 그냥 소비를 하지 않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 때도 디플레이션 이야기가 나왔다. 코로나 사태는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당장 돈이 있어도 쓸 방법이 제한되어 있다. 온라인 쇼핑도 한계가 있었다.
마스크 품귀 현상으로 보는 수요공급 법칙
다시 수요공급 법칙을 이야기할 것이다. 요새 대형마트에 가면 화장지가 넘쳐난다. 고만고만한 상품들 중 뭐라도 튀어야 팔리기 때문에 똑같은 화장지라도 미용 티슈, 아기 피부에 적합한 티슈, 향기 나는 티슈, 꽃모양 프린트 티슈 등 이런 식으로 경쟁을 한다. 예전엔 휴지가 딱 1종류였어도 비싸게 잘 팔렸는데 요새는 질 좋은 상품들이 각각의 개성을 뽐내도 평균 가격이 예전보다 훨씬 저렴하다. 왜냐하면 화장지를 사려는 사람들보다 팔아야 되는 화장지 개수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몇 개 팔릴 건지, 얼마나 비싸게 팔릴 건지 결정이 된다.
1년 전쯤 수요공급 법칙을 보여주는 현상이 발생했다. 2020년 1/4분기에 일어났던 마스크 품귀 현상이다. 코로나는 비말로 전염된다고 밝혀졌기 때문에 공기 중의 침이나 체액이 전파되는 것을 막아주는 마스크가 필수다. 한국의 인구수는 2020년 기준 5,000만 명이 조금 넘는다. 바깥 활동을 하는 전 인구가 매일 하나씩 사용하고 다음날 사용할 것을 하나 사서 집에 돌아간다고 계산하면 대략 1억 개가 필요하다.
그런데 2020년 3월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일일 마스크 생산능력은 1,000만 개였다고 한다. 마스크를 사려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파는 사람은 부족한 상황이 된거다.
사실, 한 나라에서 국민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건을 독자적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경우 마스크가 남아도는 나라에서 수입해서 물량을 맞췄을 것이다. 수입품은 관세 등 이런저런 이유로 가격이 더 비쌀 수도 있고, 우리가 마스크를 수입해온 나라가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낮으면 더 쌀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개당 300원 하던 마스크가 4,500원으로 뛰는 현상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런 가격을 부르면 아무도 안 살 테니까 말이다. 아마 다른 데서 그보다는 저렴한 가격을 제시할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마스크 품귀 현상이 문제가 된 건 전 세계에서 동시에 마스크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남는 마스크를 가진 나라가 없었다. (2020년 3월이 지나면서 우리나라가 그나마 좀 여유가 생겨서 다른 나라에 팔거나 나눠주었다. 2020년 10월에는 완전히 수출 자유화가 되었다. ) 그래서 마스크는 귀해졌고, 하나에 300원 하던 걸 4,500원을 불러도 팔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건은 적고 사려는 사람은 많으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수요공급 법칙이다.
혹시 4,5000원을 불러도 팔렸을까? 사정이 정말 절박하고 돈 좀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가격에도 사기는 샀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테니 4,500원에 팔 때보단 덜 팔렸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기본적인 수요공급 법칙을 이해했다. 바로 금리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돈에서도 수요공급 법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화폐 발행에는 정부의 힘이 작용한다.
화폐의 수요공급 법칙을 수월하게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인 배경을 조금 응용해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돈을 얼마만큼 발행할지는 한국은행이 결정한다. 신사임당 5만 원권이나 세종대왕 1만 원은 모두 한국은행이 발행한 돈이다. 화폐발행권을 가진 한 국가의 중앙은행은 굉장히 중요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즉 식민지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화폐의 이름은 조선은행권이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백동화와 상평통보를 썼기 때문에 일본은 대한민국을 식민지로 만들자마자 조선은행권을 새로 발행하게 했다.
일본 : 이제 대한제국은 망했으니 대한제국이 발행하던 화폐도 모두 무효! 다들 식민지 조선은행으로 와서 새로 발행한 조선은행권으로 교환해 가시오.
백동화는 말 그대로 백동이라는 하얀 금속에다 구리, 철 등을 섞어 만든 주화다. 상평통보도 금속으로 만든 동전이다. 당시만 해도 금속 화폐는 위조가 쉬운 편이었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사회가 아주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위조 백동화가 어마어마하게 돌아다녔다.
그래서 일본은 화폐개혁 명목으로 망한 대한제국의 동전을 모두 일본 정부의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새 지폐로 교환해준다. 물론 새로 만든 지폐에는 일본의 명승지나 일본의 연호가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사소한 것이었다. 당시 식민지 정부는 조선 사람들이 갖고 있던 조선 동전, 백동화의 가격을 원래 절반 값밖에 쳐주지 않았다. 예전에 백동화 한 닢으로 운동화 한 켤레를 살 수 있었다면 백동화 한 닢과 새로 교환한 조선은행권 한 장으로도 운동화 한 켤레를 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백동화 두 닢에 조선은행권 한 장만 내주는 식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화폐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동네 시장에서는 여전히 백동화와 상평통보가 통하니까 쓰던 대로 썼던거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날부터 백동화로는 은행에 예금도 안 되고, 세금도 낼 수도 없고, 일본 기업과는 거래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억울하지만 반값으로라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교환 가능 기간이 끝난 이후에는 받아주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재산이 반 토막이 나거나 아예 공중 분해 되어버린다.
물건과는 다른 화폐의 수요공급법칙
이 이야기는 화폐 발행에 있어 정부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꺼낸 에피소드다. 지금껏 아무리 잘 써왔던 돈이라도 정부가 그만 쓰라고 하면 더 이상 아무런 효력이 없게 된다. 이 책의 맨 처음에 나왔던 조개 껍데기도, 정부가 발행하는 화폐도 실제 물건과 바꿀 수 있는 효력이 있는 건 사람들이 '이게 돈이다' 라고 믿어주기 때문이다. 그 '신용' 에 의해 돈일 수 있는 것이다. 정부가 돈이 아니라고 하면 사람들은 조개껍데기나 동전이나 지폐를 더 이상 돈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때부터는 그냥 칼슘 덩어리나 금속 덩어리, 종잇장이 된다.
화폐의 수요공급 곡선은 이렇다.
화폐의 공급은 시장에서 물건이 공급되는 것처럼 유연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그리고 정부의 특별한 결정이 있을 때 정해진 양을 한 번에 공급한다. 그래서 공급 곡선이 수직이다. 물론 매년 얼마나 공급했는지를 시계열로 그려두면 사선으로 누운 그래프나 심전도 곡선처럼 울퉁불퉁한 선이 나올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튼튼한 수직 모양이다.
x 축은 통화량이고 y 축은 이자율, 즉 금리다. 공급 곡선은 미리 결정되어 있지만, 화폐가 얼마나 필요한지는 금리가 결정한다는 의미다. 금리에 따라 사람들은 화폐를 조금 필요로 하기도 하고 많이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런데 주어진 수요 곡선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일도 있다. 소득이 늘어나면 곡선 자체가 달라진다. 월급이 늘어나면 월급 줄 돈을 더 찍어야 하기 때문에 금리와 상관없이 수요가 증가해, 수요 곡선이 위로 올라가버린다.
앞의 그래프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 역사 이야기를 해볼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돈도 더 필요해
일제강점기 시절을 지나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다. 조선은행은 한국은행으로 새로 태어났다. 이제 한국은행은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해주려고 한다. 예전에 식민지 조선은행이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저질렀던 사기는 저지르지 않는다. 정직하게 바꿔줄 것이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조선은행권을 모두 한국은행권으로 바꿨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은행 : 사람들이 사용하던 일제강점기시절 화폐를 다 한국 돈으로 교환해줬습니다. 교환해달라는 만큼 지폐를 인쇄했더니 모두 100만 원어치를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지폐를 센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한국에 있는 돈의 총 액수는 100만 원이고, 한국의 경제규모도 100만 원이겠다. 여기에 더해 한국은행이 예비적으로 100만 원을 더 갖고 있다고 가정하면 한국에 있는 돈은 총 200만 원이다.
돈이 도는 1단계
앞에서 우리는 경제성장에 대해 배웠지만 이 이야기를 위해 다시 짚어볼 것이다. 한국에 있는 돈 200만 원을 다른 은행, 기업, 사람들이 이렇게 나누어 가졌다.
· 한국은행 100만 원
· 사랑은행 30만 원
· 성냥회사 20만 원
· 국민들 50만 원
그중 성냥 회사는 20만 원 중에서 10만 원은 원재료를 사고, 5만 원은 공장 설비에 투자하고, 마지막 5만 원으로는 5명을 고용하는데 썼다. 그렇게 20만 원을 다 쓰고 성냥을 팔아 25만 원을 벌었다. 5만 원의 이익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수중에 있는 총 25만 원으로 좀 부족하다. 이번에는 원재료만 40만원 어치를 사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막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국은 무척 가난했기 때문에 성냥 회사에서 생산한 아주 낮은 품질의 성냥도 불티나게 팔린다. 툭하면 부러지고 불도 잘 붙지 않았지만 부싯돌보다는 훨씬 낫다. 이렇게 잘 팔리는데 이전처럼 원재료를 10만 원어치만 사는건 부족하다. 게다가 원료를 이렇게 많이 사면 일할 사람도 추가로 고용해야 한다. 일도 많이 해야 하니 월급도 더 줘야 한다.
그러면 모자란 돈은 어떻게 구해야 할까? 사랑은행이 갖고 있는 30만 원을 빌려오는 수밖에 없다. 사랑은행은 금리 20%를 붙여 성냥회사에게 30만 원을 빌려준다. 이자가 20%라니 악덕이지만 사랑은행이 아니면 빌릴 때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성냥이 정말 잘 팔리기 때문에 다 팔기만 하면 이 정도의 이자는 쉽게 낼 수 있다. 성냥 가격을 2배로 올려도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릴 지경이다.
성냥을 만드는 족족 다 팔렸기 때문에 성냥 회사는 저번에 빌렸던 돈을 원금까지 다 갚고도 또 돈을 빌리러 간다. 사랑은행은 당장 빌려줄 돈이 더 필요해질 것 같으니 내년에는 더 찍어달라고 요청한다. 이렇게 행복한 나날이 수천 번 반복되면 시장에 돈이 많이 풀리지 않을까?
현실에서는 은행도 많고 회사도 많다. 그 많은 은행과 회사들이 이런 식으로 장사를 잘하면 한국은행이 얼마나 돈을 많이 발행해야 하겠는가? 가난한 나라가 처음 경제성장을 할 때는 뭐든 잘 팔리기 때문에, 그리고 잘 팔리면 사람들이 자꾸 고용돼서 월급을 받고 그 월급으로 또 물건을 사는 선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에 돈이 잘 돈다. 그러니 물건이 팔렸다는 것은 누군가 샀다는 이야기고, 물건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 월급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일단 회사가 월급을 줘야 노동자가 고객님이 되어 물건을 사러 오게 되는 것이다. 직원들 월급을 주고 당장 원재료 살 돈이 부족해진 회사는 은행으로 빌리러 온다. 시중 은행은 한국은행에서 돈을 빌리게 된다.
챕터 1에서 혁신적 변기를 만드는 사업가가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시작했던 것 기억하는가?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주체는 대부분 회사다. (주택담보대출은 여기서 예외) 개인이 회사만큼 돈을 크게 빌릴 일은 잘 없다. 연봉 3,000만 원을 받는 직원 3명만 있어서 1억 원에 가까운 돈인데 회사는 월급을 매달 현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직원이 3~4명만 돼도 현금이 필요한 일이 크게 늘어난다. 거기다 공장을 하나 짓거나, 기계 하나만 수입해오려고 해도 바로 대출을 받으러 가야 한다.
은행이 회사에게 원금보다 돈값(이자)을 먹여서 더 받고 대출을 해준다. 다 물건 잘 팔리라고 하는 것인데 물건만 잘 팔리면 다 괜찮다.
1970~1980년대 고성장기에는 돈이 참 귀했고, 돈값도 비쌌다. 이 회사 저 회사가 와글와글 생기고 그 회사들이 여기저기 투자하면서 쑥쑥 성장했다. 직원 월급 주고 사옥 짓고 공장 세우고 기계 들여온다고 너도나도 은행에서 가서 대출 좀 해달라고 했다. 물론 매달 원금과 이자를 갚을 능력이 됐으니 그랬다. 돈 빌려달라는 사람이 많으니 수요가 높은거고, 은행은 시장에 공급할 돈이 좀 모잘랐다. 한국은행이 적절하게 돈을 찍을 때도 있었지만 예측을 너무 보수적으로 해서 모자라게 발행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돈이 귀해서 이자가 비싸졌다. 한국 경제는 너무 빨리 커진 반면, 화폐의 수요공급 곡선에서 보듯 화폐 공급은 한 번 하고 끝나버린다.
돈이 도는 2단계
이렇게 될 거면 한국은행에게 매번 돈을 넉넉하게 찍어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또 그게 아니다. 한국은행이 그렇게 마구 돈을 찍어냈다간 유명한 2008년 '짐바브웨 하이퍼인플레이션 사태' 가 발생하게 될 지 모른다. 경제가 클 만큼 커서 더는 그만큼 빠르게 돌지 않거나 물가가 지나치게 올라버리면 찍어낸 속도로 다시 회수할 방법이 없다.
한국은행은 진짜, 진짜, 진짜로 모자랄 때만 신중하게 화폐를 추가로 발행한다. 그럼 은행은 무슨 돈으로 회사에 대출을 해줄까? 여기서 1단계에서 없었던 요소가 등장한다. 바로 개개인의 저축이다. 국민들이 처음에 나눠 가졌던 50만 원 중 30만 원쯤은 저축으로 사랑은행에 들어가 있었던 거다. 그리고 성냥 회사에서 받은 월급의 일부도 알뜰하게 저축했다.
사랑은행은 성냥 회사가 요청한 돈을 모두 한국은행에서 빌리거나 찍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은행에 맡긴 예금저축으로 일부를 빌려주고 일부만 한국은행에게 요청한다. 저축을 놔두고 한국은행이 돈을 막 찍어내면 저축을 다 깨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물가가 올라버린다. 회사에게 빌려줄 개인의 저축예금이 많이 필요했던 은행들은 예금에 이자를 많이 붙인다. 당연히 은행이 회사에 돈을 빌려줄 때는 예금이자보다 더 높은 이자를 붙인다.
은행 : 여러분 저축 좀 해주세요. 기업들에게 대출을 해줘야 하는데 돈이 없어요.
고객 : 돈을 장독대 밑에 파묻어 두기도 뭣하고, 이자 많이 주니까 뭐···.
은행 : 이자 정말 높게 잘 쳐드려요. 돈이 귀해요.
고객 : 좋은 투자 상품 있으면 추천 좀 해줘봐요. 은퇴 후에 이자로 먹고 살게.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경제가 성장하면 성장 속도는 무척 더뎌지게 된다.
1970년대
국민 A : 이번에 적금 타면 라이오도 사고, 화장실도 수리해서 온수기 달고, 세탁기라고 옷도 넣기만 하면 빨아주는 기계가 나왔다던데 그것도 좀 사볼까? 그건 그렇고 외국엔 텔레비전을 켜면 총천연색으로 나온다던데 우린 언제 그거 살 수 있지? 나와도 너무 비싸겠지? 옆집사람은 벼르고 별러서 차를 구입했다던데 그건 다음 적금 탔을 때 사고···. 사실 제일 급한건 정수기에요. 우리 집이 언덕 꼭대기라 매번 약수터 가서 물 채워오기가 너무 힘들거든. 아, 사치가 아니라 당연히 수돗물 끓여 마시긴 하는데 자꾸 녹물이 나와서 해본 소리에요. 녹물이 나와서.
2020년대
국민 B : 가전이요? 사는데 부족한 건 없어요. 김치냉장고도 있고, 컴퓨터도 산 지 얼마 안 됐고, 세탁기랑 에어컨은 입주 옵션이었고 비데는 렌탈이고··· 음, 수비드 머신이나 건조기가 갖고 싶긴 하네요. 스마트폰은 약정이 안 끝났고···. 건조기가 있으면 편한거지 꼭 필요한 건 아니라서요. 성과급 나오면 생각은 해보려고요. 근데 요새 경기가 하도 안 좋아서 성과급 나올지 모르겠네.
사라들이 웬만한 건 다 갖고 있어서 물건이 줄어든다. 대중적인 핸드폰 기기가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가던 2009~2011년처럼 기술혁신이 일어나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핸드폰을 갈아 치우는 수준의 소비가 일어나지 않은 한 돈은 저축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마땅히 투자할 곳도 찾기 어렵고 회사가 빨리 성장하지 않으니까 연봉도 크게 오르지 않는다. 가끔 TV에서 나오는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는 대다수가 최첨단 기술을 가진 혁신 기업이거나 그간 축적한 자본 (회사의 저축)을 기술에 충분히 투자할 수 있는 대기업이다. 이제는 굉장히 새롭고 아주 파격적인 제품이 아니면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힘들다. 진짜 새로운 것만 팔리는 것이다. 회사도 굳이 돈을 빌리려 하지 않고 은행도 굳이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니까 돈의 가치, 금리는 저렴해진다.
회사가 돈을 빌릴 때
은행 : 금리가 이렇게 낮은데 기업 여러분, 빌려 가셔서 투자 좀 해주세요.
사장님 : 투자는 아니지만 경영이 어려워서 그런데, 경영자금 대출 괜찮을까요?
은행 : 대출 변제 능력이 되시는지 심사해드리겠습니다. 규모별, 업종별로 다 달라요. 회사가 부도나면 저희는 돈을 잃는지라.
사장님 : 30년 전에 저 젊을 땐 이렇게 까다롭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은행 : 대신 그때는 금리가 높았잖아요. 그럼 심사 대충할 테니 대출금리 2배로 갚으실래요?
사장님 : ···그냥 심사 성실하게 받겠습니다.
개인이 돈을 빌릴 때
고객 : 저기, 저축하러 왔는데요. 금리 높은 상품 좀 추천해주세요.
은행 : 고객님, 예적금은 특판 상품을 이용하셔야 그나마 금리가 좀 높아요, 특판 상품도 2%대 후반은 찾기 힘드실 텐데···.
고객 : 요새 금리 왜 이렇게 낮아요?
은행 : 하하하··· 그러게요, 일단 한국은행에서 정한 기준금리도 너무 낮고요. 개인 고객님이 저금하시는 수백~수천 만원의 돈으로 경제를 돌리기에는 경제 규모가 너무 커져버렸어요. 투자할 만한 기업은 많지 않은데 시중에 돈이 넘치고요.
고객 : (속마음) 수천 만원이 별 것 아닌 돈이 되다니 한국 경제 많이 컸네. 맨 처음엔 총 200만 원 갖고 시작했는데 말이야.
간단하게 말해 지금 예적금 금리가 낮아진 큰 이유는 한국 경제가 충분히 커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이 큰 부족함 없이 살고 있어 회사가 어떤 물건이든 팔기만 하면 모두 팔리던 시절도, 그렇게 고용된 사람들이 월급을 받아 각종 물건들을 마구 사던 시절도 끝나서 더는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된거다.
게다가 한창 경제가 성장하던 시절 사람들이 저축한 돈과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돈이 이미 많다. 개인의 예금이나 적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말이다. 공급에 비해 돈의 수요가 줄어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경제성장 속에서 늘어나는 사람들의 화폐 수요와 한국은행의 화폐 공급,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은행이 금리를 통해 시장 거래를 하는 모습을 살펴봤다. 화폐의 수요공급 곡선이 왜 금리와 통화량 (돈이 도는 속도) 를 통해 그려지는지 대강 아시겠는가?
사실 현실에서 작동하는 금리도 훨씬 복잡하다. 이 장의 처음에 금리에 대해 설명했던 것 기억하는가? 금리는 돈의 값이고, 돈의 값은 기회비용과 돈을 빌리는 목적과 돈을 빌리는 기간, 개개인의 신용도와 같이 돈 잃을 확률을 계산해서 결정한다.
그런데 그건 누가, 도대체 무슨 기준과 무슨 공식으로 판단하는 건지 궁긍하지 않는가?
기준이 되는 금리. 그거 대체 누가 , 왜 정하는건데?
금리의 종류
이제 구체적으로 현실 이야기를 해볼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금리에는 참 많은 종류가 있다.
· 실질금리
· 명목금리
· 기준 (정책) 금리
· 시장금리 : 표면금리, 실효금리, 실질금리, 대출금리, 단기금리(콜금리·CD금리·CP금리), 장기금리(보통채권), 고정금리, 변동금리···.
실질금리와 명목금리는 돈을 빌릴 때와 쓸 떄의 시점 차이 때문에 생겨난다. 금리에는 물가상승률이 포함되는데 돈을 빌리는 시점의 금리에 적용되는 물가상승률은 과거 데이터를 통해 예측한 가상 수치다.
1년간 생활비로 쓰려고 1월 1일에 돈을 빌렸는데, 그 해1월 2일부터 12월 31일까지 물가가 얼마나 오를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빌린 돈을 소비하는 기간은 1월 2일에서 12월 31일까지다. 그러므로 1월 1일에 은행에서 '금리는 4.3%입니다' 하고 계약서를 써주는 금리는 명목금리, 12월 31일에 뒤돌아보니 1년간 오른 물가상승률 1.3%를 뺀, 그러니까 내가 실질적으로 부담한 금리 3%는 실질금리다.
내가 은행에 예금한 돈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1.3% 이자로 1년짜리 예금을 넣었는데 만기가 되는 동안 물가가 1.3%올랐다면 나는 1년 전과 똑같은 가치의 돈을 갖게 될 뿐이다. 요새 심심찮게 보도되는 '실질적인 제로금리' 가 바로 이 얘기다. 실질금리가 0%에 가까우면 예금이나 적금을 한다고 내게 돌아오는 이득은 전혀 없는 셈이다.
내가 실제로 은행에 가서 돈을 맡기거나 빌릴 때 만나게 되는 금리는 시장금리다. 그리고 그 시장금리의 종류가 다양한 것이다. 그런데 시장금리는 모두 기준(정책)금리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큰돈이 오가는 국가 간 거래, 회사 간 거래 일 때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뉴스에서 '금리가 어쩌고 ···. ' 하면서 나오는 이야기는 대부분 기준금리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국은행이 이 기준금리를 매년 발표한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돈이 돌아서 경제가 성장하고, 돈값이 저렴해진 것은 알겠다. 그런데 돈값이 정확히 얼마나 싸진 건지 한국은행은 어떻게 아는가? 1.4%라든가, 3.8%라든가. 세상이 얼마나 크고 다양하게 변하는데, 어떻게 딱 떨어질 수 있단 말인가? 한국은행 다니는 사람은 세상을 다 아는가?
맞다. 금리를 공부하면 다들 한 번쯤은 이렇게 투덜거린다. 그 금리를 정하는 한국은행은 정말 다 알고 있을까?
기준금리나 김밥천국 김치찌개나
기본적으로 시장경제는 성장을 한다. 성장을 하면 물가가 오르고, 물건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월급이 올라간다. 물가가 오르고 월급이 오른다는 뜻은 돈을 더 많이 쓰면서 더 많이 받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10년 전의 1,000원과 10년 후의 1,000원은 가치가 다르다.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이 확 적어진다. 그래서 1,000원을 빌려서 10년 후에 고스란히 1,000원만 돌려주면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A : 오랜만이야! 10년 전에 얻어먹은 새콤달콤 1개!
B : 나 10년 전에 너한테 새콤달콤 10개 줬는데?
A : 10년 전에 1,000원어치 준거잖아. 지금은 그 돈으로 1개밖에 못사.
B : 그래도 10개 얻어먹었으니까 10개를 돌려줘야지!
A : 난 1,000원어치 얻어먹고 1,000원 어치 돌려주는 건데?
B : 뭐라고?
문제는 각 물건마다 값이 오르는 정도가 다르다는 거다. 벤츠 자동차는 10년간 20배 올랐을 수도 있고, 다이슨 청소기는 10년간 3배만 올랐을 수도 있다. 그럼 매년 돈값이 얼마나 올라야 하는 걸까? 그걸 어떻게 누가 정할까?
사실 사회에선 자연스럽게 알아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누군가 어디선가 '적당히' 정해버린다. 국내 기준금리는 각종 경제지표를 고려해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을 정한다. "국내 경제 상황을 보아하니 현재 돈값은 0.75%가 적당하겠노라. 시중 은행들은 반드시 참고하도록 하여라."
이것이 바로 기준금리다. 해가 동쪽에서 뜨고 치킨은 누구에게나 맛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지만 ··· 물가상승률 등 경제지표 같은 건 사실 그만큼 자연스럽게 정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면 물가상승률은 어떻게 정해지는 걸까? 세상의 모든 물건 값을 분석해서 평균을 내는 것일까? 당연히 그건 불가능하다. 각 산업별로 가장 잘 팔리고 많이 팔리는 대표적인 물건을 골라서 계산을 하지 않는다.
경제지표란 전문가들이 그때그때 필요한 조합을 선택해서 계산하는 것인데, 몇 십 년 동안 이걸 계속 하다 보니 제일 좋은 조합이 비슷비슷하더라는 것이다. 그 비슷한 조합들이 마치 김밥천국 김치찌개 조리법처럼 '이렇게 끓이면 실패는 안 한다!' 라는 메뉴얼로 고정되다시피 만들어진 것이다.
기준금리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위해 어느 정도의 돈값이 제일 좋을지 계산을 한 다음, 정해서 발표하는거다. 정말 누군가가 모든 걸 고려해서 만능 지표를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AI도 아직 그 정도는 안 된다. 그래도 기준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런데 기준금리가 1%면 모든 금리가 1%가 된다는 뜻일까? 그건 아니다. 기준금리는 마치 이런 것이다.
교수 : 기말 과제는 리포트로 대체하겠어요. 과제는 한글 파일로 제출하세요. 참고로 작년 선배들은 10페이지 전후로 작성했습니다.
학생1 : 폰트 모양이랑 사이즈는요?
교수 : 자율제출입니다.
학생2 : 표지는 만들어도 되나요?
교수 : 형식에 대한 것은 조교에게 물어보세요.
이렇게 되면 아주 다양한 형식의 리포트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9페이지나 11페이지정도로 써서 제출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고, 기본 폰트를 쓰는 학생도 있을 수 있고, 수정을 한다고 해도 돋움체나 바탕체에서 크게 변하진 않을 테고 폰트 사이즈를 조금 키우는 학생도 있겠지만 평균 10페이지라는데 30페이지를 써오거나 5 페이지를 써오거나, 본문을 36포인트 빨간색 볼드 밑줄 궁서체로 쓰는 학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학생들은 둘 중 하나일 거다. 너무 잘 써서 대박치는 극소수와 C 아니면 D를 받을 대다수 ···.
기준금리는 '10페이지 전후', '한글 파일' 같은 역할이다. 한번 딱 정해지면, 자율적으로 뭘 하더라도 크게 벗어나면 안 되는 암묵적인 룰과 마찬가지다.
미국 영향을 크게 받는 기준금리
그런데 국내에만 기준금리가 있을까? 아니다. 전 세계의 돈값은 미국이 결정한다. 서로 다른 화폐 단위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가 서로 거래를 할 때는 대부분 미국 달러를 쓴다. 달러는 전 세계 돈의 기준이다.
한국과 터키가 거래할 때는 5만 원과 350리라가 오가지 않는다. 5만 원을 대략 45달러와 교환하고, 350리라도 대략 45달러와 교환한 뒤 각자의 달러를 사용한다. 한국 돈은 한국에서밖에 못 쓰고 터키 돈을 쓰려면 터키 사람들과만 거래해야 한다. 하지만 달러를 사용하면 터키 사람들에게 고양이 밥그릇을 판매한 돈으로 이집트에 가서 낙타모 장갑을 살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이후에 더 자세히 할 것이다. 일단 지금은 달러가 세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돈들의 기준이라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미국내에서 기준금리를 올리거나 내리면 전세계의 중앙은행이 자기네 국내 사정과 적당히 조정해 자기들 기준금리도 올리거나 내린다는 사실만 알고 가도록 하자.
마치 회사 조직도와 같다. 사장은 미국 연방준비제도고, 각 부서의 부서장들은 다른 자유시장경제국가의 중앙은행들인거다.
금리 내려온다
요샌 기준금리 내린다고 대출이자도 내려가고 그러지는 않다. 개개인이 받는 대출을 가계대출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계대출을 많이 받는 편이다. 주택담보대출을 포함한 가계대출 잔액은 2019년 5월 기준으로 920조 7,000억 원이다. 규모로 세계 7위고, 대출액이 늘어나는 속도로는 가장 빠르다. 이렇다는 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살면서 가계대출을 한 번 이상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사정이 이런지라 다들 가계대출 금리에 민감하다. 그런데 뉴스에 매번 '제로금리 시대' 라며 금리가 무척 낮아졌다는데, 주택담보대출이나 신용대출금리는 별로 내려가질 않는다. 분명히 올라갈 땐 재깍 올라갔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2019년 10월 18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하나 보겠다.
예금금리는 신속 인하, 대출금리는 미적··· 은행들 '얌체 이자장사'
요약하자면 예금금리를 2018년 12월 대비 0.2%p나 낮추면서 가계대출 금리는 0.12%p밖에 안 떨어트렸다는 것이다. 거의 절반 수준이다. 기사에 따르면 은행들이 미적거리면서 기준금리가 내려가도 대출이자는 늦게 낮추고, 적게 낮춰서 시차에 따른 마진을 챙겨 상반기 이자 수익만 무려 20조 원이 났다고 한다. 그 이전 한국은행 통계를 들여다봐도 예금이자 뚝뚝 떨어지는 동안 대출이자는 찔끔 떨어졌다고 한다.
물론 은행도 할 말이 있다.
은행 : 이자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요. 예금금리는 그나마 저희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대출금리는 저희도 손 못 대요. 코픽스(COFIX)에 연동돼 있어서 따라할 수 밖에 없다니깐요? 예금이자가 내린 건 맞지만 그건 내릴만 해서 내린거고, 대출이자를 안 내리고 싶어서 안 내린 것은 아니에요. 반쯤 억울하네요.
코픽스는 'Cost of Fund Index'의 약자다. 직역하자면 자금조달비용지수다. 은행은 금융기관인 만큼 일단 먼저 돈을 갖고 있어야 돈을 빌려주고, 다시 받고, 이자도 주고 한다. 즉,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은행의 가장 큰 업무다.
앞에서 우리는 간단하게 이해하기 위해 은행이 돈을 버는 방법을 '저축' 하나만 다루고 넘어왔다. 하지만 은행이 돈을 버는 방법은 개개인의 저축성 예적금이나 기업에 대출해주고 받는 이자 수익을 포함해 여러가지가 더 있다. 대표적인 8가지 상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코픽스에 반영되는 은행의 자금조달 상품
정기예금, 정기적금, 상호부금, 주택부금, CD, RP, 표지어음매출, 금융채
익숙한 이름도 있고, 뭔지 모를 이름도 있을 것이다. 일단은 은행이 8가지 상품을 팔아서 돈을 번다고 생각해보자. 한국에는 코픽스 산출에 관여하는 국내 주요 8개 시중 은행이 있다. 국민은행, 기업은행, 신한은행, 씨티은행, KEB하나은행, 우리은행, SC제일은행, 농협은행이다. 이 은행에서 다루는 앞의 8가지 상품의 금액과 금리를 공식에 넣고 산출한 결과 값이 바로 코픽스다. 여기서는 8가지 상품의 구성이나 성격, 공식의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다.
① 대출금리가 은행의 금융상품 가격과 금리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한다는 것
② 은행의 금융상품들은 해외와 국내의 실물시장 및 금융 (주식)시장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
③ 실제 시장경기는 각종 정치 · 경제적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
④ 그럼에도 대출금리 역시 중앙은행 기준금리의 영향을 받으며, 중앙은행 기준금리가 하락하면 대출금리도 (어느 정도) 하락한다는 것
이 4가지만 이해하고 넘어가면 된다. 은행이 알아서 정할 수 있는 예적금 금리보다 복잡한 셈이다. 받은 돈에 가격을 쳐주는 것보단 있는 돈을 빌려주는 데 민감한 건 어쩔 수 없다.
은행 : 그러니까, 요새 글로벌 경기가 하도 안 좋아서 대출금리를 막 내릴 수가 없다니깐요. 시장 좀 살려보겠다고 금리를 내리는건데 금리를 내려도 시장이 묵묵부담인 걸 어떻게 합니까. 그냥지금처럼 이자 내세요.
고객 : 그럼 코픽스 금리에 붙는 가산금리라도 좀 낮춰주세요. 신용점수별로 더 받는 이자 있잖아요.
은행 : 글쎄요···. 신용점수 관리 잘 하셔야지··· 어험···.
즉, 대출이자는 주식지표나 채권금리 등에 연동되어 있는데 그런 건 세계정세에 따라 움직이고, 세계정세가 대출금리를 그 정도 높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금이자는 은행이 고객에게 은행 돈을 주는 거니까 은행 마음대로 정할 수 있지만, 대출이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은행은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받는 수수료로 먹고산다. 그런 만큼 은행이 '밥줄' 인 대출이자를 잘못 결정했다가 손해를 보면 큰일난다. 그래서 전 세계 기업들의 성적표라고 할 수 있는 주가에 연결해둔 것이다. 기업 성적에 따라 이자를 받겠다는 것이다.
금리를 내려도 주가가 폭락했다?
금리를 내린다는 것은 돈값이 싸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사업은 대출을 받아서 한다. 워낙 큰돈이 들어가니 금리가 내려가면 대출 받은 사람은 이자를 적게 내고, 이자를 적게 내니까 대출 받아서 집도 사고 주식도 사고 설비도 사고 뭐가 됐든 사고파는 행위가 조금 더 활발해져서 경기에 활력이 돌게 된다. 게다가 요샌 집집마다 가계대출도 많다. 이자가 내려가면 내려간 만큼 여유 자금이 생겨서 조금 더 쓰기도 한다. 경기가 풀리면 기업 실적이 좋아지니 기업의 성적표인 주가도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 그게 잘 안 먹힌다. 기사를 하나 더 보겠다. 2020년 3월 내일신문 기사다.
미 연준 금리인하에도 '증시 급락'
2020년 3월이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마구 퍼지고 있을 때였다. 처음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중국과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폭발적인 확산세를 보여 미국과 유럽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보고 있을때였다. 그런데 3월이 넘어갈 즈음 이탈리아를 비롯해 영국과 미국까지 바이러스가 퍼져서 동북아시아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됐다.
이 바이러스 감염증의 가장 큰 문제는 높은 전염성이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기만 하면 감염이 돼버리니 각종 생산 활동, 소비활동이 멈추게 된다. 경제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전 세계 무역 거래의 기준으로 임명된 돈, 즉 기축통화인 달러 제조국 미국이 깜짝 놀라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이하 연준) 긴급회의를 연다.
연준에서는 달러의 금리를 포함한 미국의 통화정책을 결정한다. 이때 연준은 시장의 불씨를 살리겠다고 기준금리를 0.5%p나 인하한다. 굉장히 크게 낮춘거다. 금리를 낮추면 경기가 활성화되고, 반대로 금리를 올리면 경기가 진정된다고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워 알고 있다. 그래서 연준은 금리를 내렸다. 하지만 주가가 대폭락을 한다.
교과서보다 힘이 센 사람 마음
이상하다. 왜일까? 교과서에서는 분명 금리를 낮추면 경기가 활성화된다고 했는데 말이다. 이제껏 그런 식으로 경제가 돌아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돈값을 내렸는데도 사람들이 뭘 사거나, 사고팔지 않고 팔기만 한다. 팔아서 현금을 손에 쥐고 있으려고 한다. 경제는 결국 사람들의 기대와 행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돈 값이 싸졌다 → 사고 싶던 공장 설비, 돈 빌려서 사자! 투자하는거야!
매달 내던 주택담보대출 이자가 내려가서 5만원 여유가 생겼다 → 봄 옷 한 벌쯤 사도 되겠지?
교과서에 나오는 이론이지만 잘 살펴보면 결국 사람 심리와 관련된 이야기다. 싸다고 '생각' 하니까 돈을 더 쓰고 여유 자금이 생기면 왠지 더 '쓰고 싶다' 현실에서 경제란 사람들의 심리와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미국도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겁을 먹어 경기가 죽을 것 같으니 '이자를 내려서 사람들의 마음에 행복을 갖다주자!' 라는 전통적인 결정을 한 거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너무 반복돼왔다는 것이다. 안 좋은 소식을 전할 때마다 위로의 의미로 짜장면을 사주면 처음에는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이것이 반복되면 짜장면을 사줄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생겼구나.' 하고 짐작하게 된다. 2020년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A : 미국 연준이 기준금리를 내렸어···.
B : 코로나 바이러스, 엄청나게 몹시 어마어마하게 나쁜 일이란 뜻이구나, 큰일났다!!
C : 주식 더 떨어지기 전에 얼른 팔아서 현금 챙기자!!!
→ 증시 : 으아아~~~ 떨어진다!!
군중심리를 이기는 정책은 적어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사회에서는 존재하기 힘들다. '자기실현적 예언' 때문이다. 그렇게 주가가 떨어지고 실물경기도 멈춰버리고 코픽스가 기준금리만큼 낮아지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기준금리를 비롯해 다른 금리들이 하도 낮아지다 보니 2020년 6월 기준, 주택담보대출금리도 10년 내 가장 낮아지기는 했다. 기준금리나 예적금 금리만큼 낮지는 않지만 말이다.
미국이 전 세계 기준금리를 정하는 이유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왜 계속 미국 이야기를 하는걸까? 우리는 한국에 살고 한국에 있는 OO 은행에서 적금도 하고 대출도 하는데 말이다. 우리가 미국에 살지도 않고 미국에서 은행 거래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경제뉴스를 보다보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각종 뉴스에서 매일매일 지치지도 않고 미국 소식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 미국 증시가 급락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왜 난리지?
· 미국이 기준금리를 내렸다는데 왜 우리나라가 따라 내리지?
· 미국 실업률이 높아졌는데 왜 우리나라에서 크게 보도하지?
· 경제 고수들은 미국 뉴스를 챙겨 보는데 그 이유가 우리나라 뉴스를 보는 것보다 미국 소식을 한 발 더 빨리 알 수 있어서래.
미국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미국 사람들이 경기가 안 좋다고 생각해서 소비를 줄이면 우리나라 물건도 안 사게 될테니 우리나라는 미국에 수출을 굉장히 많이 하고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과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에게 문을 걸어 잠그는 상황은 경제에는 최악이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세계는 하나인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한국은행에서 "너희가 경제를 다 알아?" 라고 물어보기 전에 미국에게 "너희가 세계경제를 다 알아?" 라고 물어봐야 한다. 전 세계 무역 거래의 기준인 기축통화가 미국 달러고, 미국이 달러를 발행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도 기준에 맞춰서 각자 화폐의 돈값을 조절해야만 한다.
그러니 미국이 금리를 낮추면 전 세계가 따라서 금리를 낮추고, 그러면 세계적으로 경기가 활발하게 돌아간다. 우선 돈을 빌릴때 부담이 적어지니 사람들이 각종 목적으로 대출을 받으니 돈을 대출 받으면 그 돈을 쓰니까 경기가 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이 금리를 낮췄는데도 주식시장은 변한 것이 없다. 시장이 '행! 이번엔 미국 너네도 안 먹혀!' 라고 코웃음을 쳤다. 교과서대로 하면 금리가 내려갔으니 사람들이 대출을 마구 받아서 주식도 사고 부동산도 사고 여기저기 투자도 하고, 그렇게 돈이 도니까 시장에 통화량(유동성)이 많아지고, 그럼 경기가 살아나고 인플레이션이 와야 하는데 말이다.
현실에서는 이자도 여러 종류가 있고, 대출이자는 안 내려가고, 부동산은 정부가 규제하고 있고, 유동성은 높아졌는데 딱히 투자할 곳이 보이지 않으니 그다지 경기는 부양된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을 유동성 함정이라고 한다.
또 하나. 미국이 금리를 내렸다는 것이 우리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었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답은 이렇다. 몇 번 이야기했듯 달러가 간접적으로나마 세상 다른 모든 돈의 이자를 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돈이 우리나라 돈의 값을 결정한다니 아무리 무역 거래 시 편리하기 때문이라지만 약간 기분이 나쁠 수 있다. 그리고 대체 왜 무역을 할 때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기준이 꼭 있어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갈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역을 알아야 한다.
무역과 금리. 거래와 돈값의 상관관계
무역과 금리는 어떻게 연결이 될까? 우선 무역이 무엇인지 더 정확하게 알아보자. 앞서 챕터 1에서 오렌지 구입단 이야기를 했지만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시원한 하이볼 제공 프로젝트
여기 퇴근 후에 한 잔 마시면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이 다 사라지는 하이볼 레시피가 있다. 정부는 직장을 다니는 국민들이 퇴근 후 누구나 하이볼 한 잔씩은 마실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고 한다. 직장인 삶의 질을 보장하고 싶지 때문이다. 하이볼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무역을 해야 마실 수 있는 하이볼 제조 레시피
재료 : 투명한 컵, 머들러, 취향에 맞는 위스키, 레몬 한 조각, 꿀 작은 1스푼, 탄산수(토닉워터), 얼음
1) 위스키 적당량과 꿀 작은 한 스푼을 먼저 섞어 걸쭉하게 만든다.
2) 얼음을 가득 넣는다.
3) 탄산수(토닉워터) 를 입맛에 맞춰 적당히 따른다.
4) 레몬을 조금 짠다.
5) 머들러로 살짝 휘젓는다.
6) 마신다.
이제 다음과 같은 재료를 가진 나라를 상상해보자.
러시아 : 우리 자원은 얼음과 석유밖에 없어.
한국 : 얼음과 위스키는 없지만, 공업이 발전해서 토닉워터를 만들 수 있지!
영국 : 얼음, 토닉워터는 없지만 위스키는 있지
러시아 사람도 영국 사람도 한국 사람도 맛있는 하이볼을 마시고 싶다. 하지만 하이볼의 주요 재료는 앞에 적힌 대로 얼음, 위스키, 토닉워터 (그리고 약간의 꿀과 레몬) 이다. 서로 거래를 하지 않으면 각자 얼음만 핥거나 토닉워터만 홀짝거릴 수밖에 없다. 영국 사람은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그래도 뭔가 아쉽다. '내가 쟤들한테 위스키를 팔면 그 대가로 다른 좋은 걸 좀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자 토닉워터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한국 사람이 나선다.
한국 : 어어 영국 사람, 이리와 봐. 러시아 사람도 이리와 봐.
"서로 언어도 다르고 화폐 단위도 다르고 세금도 달게 매기는 나라들끼리 거래하는 것을 무역이라고 한다. 그렇게 3명이 모여 각자의 자원을 물물교환해서 3명의 사람은 무역을 통해 맛있는 하이볼을 즐기며 이전보다 높은 삶의 질을 누립니다···." 라고 평범한 경제학 입문서는 설명한다. 이 책에서는 3명이서 만나기로 했는데 만날 장소와 만날 장소까지 갈 교통수단까지 고려하는 현실적인 조건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중간 지점은 미국이다.
공통된 돈, 기축통화의 필요성
미국에서 미국 사람이 말한다.
미국 : 미국 사람은 하이볼 안 마시는데, 우린 콜라만 마셔. 장소 빌려주는 값은 콜라 한 병으로 합시다.
그런데 러시아, 영국, 한국 사람 아무도 콜라가 없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셋을 미국까지 태워다 줄 일본 비행기 조종사, 프랑스 유람선 선장, 중국 철도 기장도 하이볼을 안 마시는 것이었다.
일본 비행기 조종사 : 우리도 하이볼 안 마시는데···.
프랑스 유람선 선장 : 필요없는 거 줘봤자 소용없다. 나한테 필요한 거 줘야지.
중국 철도 기장 : 너희, 나한테 뭘 주고 통행할래?
골치 아프게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한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증표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 증표로는 세계 어디에서나 뭐든 교환할 수 있는거지'
물론 무역을 하기 전부터 사람들인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미 프랑스 프랑이나, 일본 엔이나 중국 위안 같은 국내용 화폐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 나라 안에서도 서로 믿을 수 있는 증표가 필요했을 테니 말이다.
오렌지 구입단 시절에는 조개껍데기를 돈으로 사용했지만 문명이 발달하다 보면 각자 필요한 돈의 단위도 다르고, 돈의 디자인도 다르고, 돈의 역사도 달라진다. 조가비껍데기나 모시조개 껍데기나 같은 조개껍데기라고 우겨볼 수 있었던 원시사회와 달리 고대 문명이 등장하면서부터는 돈에도 국적이 생겼다.
왕: 오늘부터 이것을 증표로 하니, 내 명령이 통하는 곳에서는 모두 이걸 갖고 물건과 교환할지어다.
B국, C국, D국 : 싫은데.
문제는 이게 어디까지나 '국내용' 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국왕이 중국 천자에게 명령하면 프랑스와 중국 사이에 전쟁이 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세계적으로 통하는 증표는 무엇으로 해야 할까? 인간은 필요성이 생기면 어떻게든 만들어낸다.
예전에는 그것이 금이었다. 19~20세기 정도가 되자 대부분 종이나 다른 흔한 금속으로 만든 화폐를 사용했다. 단, 각국 화폐당 금 교환 비율을 정해서 금 1그램당 100앤 이런 식으로 비율을 맞췄다. 중간에 금을 끼고 한국에서 3,000원 짜리면 일본에서는 300엔으로 해서 지폐가 왔다갔다 했다.
대신 은행들은 3,000원을 갖고 가면 언제든 금 3그램으로 바꿔줄 수 있어야 했다. 금이랑 교환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화폐를 돈으로 쳐준 것이다. 원래는 금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금이 무겁고 갖고 다니니 힘드니 화폐라는 금 교환권을 만들어서 주고받기로 했다. 그러니 금이 모자라서 교환이 안 되면 교환권이 사기인 셈이다. 즉, 갖고 있는 금만큼만 돈(=교환권)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환권으로서의 화폐 제도는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제도니까 '통일된 돈(=기준) 이 필요하다' 는 개념만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그렇다면 이제 금처럼 유한한 매장량에 발목 잡히지 않아도 되는 업데이트된 기준이 필요해진다. 금 다음으로 선택된 기준은 바로 미국 달러였다.
금이 화폐의 기준일 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첫째는 금광산이 있는 나라가 돈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 둘째는 금 캐는 속도가 느리거나 더 이상 금이 채굴되지 않으면 돈을 못 만든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시기가 1944~1971년 즈음이다.
이때 '가장 힘이 센 나라'가 미국이었다. 전 세계 제조업체의 절반을 보유한 나라, 그래서 물건을 가장 많이 만드는 나라 또한 미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많이 쓰이는 화폐 또한 바로 미국 달러였다.
선진국들 : 금만큼 전세계에 이미 많이 존재하는 것이 달러잖아. 그리고 1달러 갖고 살 수 있는 물건이 뭔지 생각해봤을 때 1,000원이나 10엔보다 이것저것 바로바로 떠올리기 쉽잖아? 게다가 어차피 다들 미국이랑 무역하잖아. 무역을 하려면 자기들 돈을 달러로 바꿔야 하니까 다음 기준은 그냥 달러로 하자.
이렇게 미국 달러는 전 세계 무역의 기준이 됐던 것이다.
기축통화를 따라가야 하는 이유
기축통화, 단어의 뜻을 그대로 풀어 쓰면 굴대(중심축)가 되는 돈이라는 뜻이다. 굴대란 바퀴의 중간에 들어가 있는 기둥이다. 굴대가 없으면 바퀴를 돌릴 수가 없다. 그러니 기축통화는 모든 다른 돈들이 굴러가게 만드는 중심 역할을 하는 돈이라는 뜻이다.
A : 그럼 무슨 돈이든 무역을 할 땐 달러로 바꿔서 써야 하니까 달러만 진짜 돈이겠네?
B : 네.
A : 그럼 달러 많이 갖고 있는 나라가 돈 많이 갖고 있는가?
B : 네
A : 미국은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내는가?
B : 그런 편이다.
A : 기준이 자꾸 바뀌면 혼란스러우니까 달러를 찍어내는 미국이 계속 세계 금융 질서를 통제해야겠네?
B : 일단은 네. 다들 그렇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기축통화국의 위엄입니다.
그래서 각국 돈들이 달러의 값, 즉 기준이 되는 축인 화폐의 값이 오르락내리락ㄹ 할 때마다 같이 요동치는 것이다. 기준이 바뀌는데 기준에 맞춰 능력껏 조정해야 한다.
물론 이건 국제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따르지 않으면 미국과 전쟁을 해야 하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금리를 내버려둬도 되고, 심지어 올려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2가지 모순적인 문제점이 생긴다.
① 미국 금리가 내려가서 미국 경기가 활성화됐는데 우리나라 경기는 그대로다.
→ 미국에 매력적인 기업이 많이 생겨서 투자자와 투자금이 미국으로 빠져 나간다.
→ 우리나라 경기가 안 좋아진다. 금리를 내려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② 미국 금리가 내려가서 미국의 각종 금융상품보다 우리나라의 금융상품이 더 매력적이 됐다.
→ 외국인 투자자들이 우리나라 금융상품을 사려고 투자금을 들고 마구 들어온다.
→ 우리나라 경기가 좋아진다. 금리를 내릴지 말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둘 중 뭐가 될지는 일단 그 일이 벌어지기 전엔 아무도 장담은 못한다. 좋아질지, 나빠질지 모르면서 이란 주사위를 던지는 것을 도박이라고 한다. 그런데 국가정책은 도박을 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의 인생이 걸려 있다.
회사에서 매달 정해진 액수의 월급을 주는 대신에 제비뽑기를 해서 검은색이 나오면 계약 연봉의 10배, 하얀색이 나오면 0원을 준다면 어떨까? 신입사원 시절엔 1~2번 해볼 만도 하겠지만 먹여 살릴 가족이 있는 분은 그런거 강요당하면 노동부에 신고하고 퇴사할 것이다. 다행히 그런 도박을 하지 않고 미국 금리를 따라 비슷하게 조정하면 현상 유지는 된다. 물론 역전되는 현상이 벌어지기는 하나 어쨌든 대외적인 균형은 맞춰진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닌 대부분의 교역 상대국이 비슷하게 미국을 따라간다. 그래야 세계경제가 큰 변화 없이 돌아간다. 변화가 나빠서가 아닌 혹시라도 나쁜 방향으로 일어나면 큰일이 나기 때문에 웬만하면 다들 '예측 가능한 범위 안' 에사 세계경제를 돌리고 싶어한다. 전문가들은 경제가 좋아진다고 해도 단기간에 지나치게 끓어오르지 않고 꾸준히 조금씩 좋아지길 바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좋아지는 일은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경기가 활성화되면 마냥 좋은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경제가 지나치게 빨리 커지고 빨리 활발해지면 부작용도 마찬가지로 빠르게 자라나서 대처하기가 몹시 까다로워진다. 그러니 현상 유지를 하면서 과거의 부작용들을 천천히 치료하고 싶어 하는데, 이때 '현상 유지' 의 기준이 미국인 것이다.
또 하나, 미국 금리에 우리 금리를 맞추는 이유가 있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낮출 때는 무슨 이유 때문일까? 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낮추는 거다. 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은 현재의 경제가 우울하게 침체되어 있다는 뜻이다. 미국 경제가 침체돼 있다는 건 미국에 물건을 수출하는 나라의 사정도 같이 안 좋다는 뜻이다. 미국 노동자들의 주머니에 돈이 없는데 어느 나라의 물건을 사주겠는가 그러니 미국이 금리를 내리면 미국 경제가 안 좋다는 의미고, 미국 경제가 안 좋으면 우리나라 경제도 안 좋을테니 우리도 경제활성화를 바라며 금리를 낮출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이자 많이 받으니까 금리가 높은게 좋은데, 전체적으로는 이자가 낮은 것이 좋은 건가 보죠?"
금리가 낮아지면 경제가 활성화된다니 뭔가 좋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정답은 '그때그때 다르다.' 는 것이다. 금리 자체가 아니라 '현재의 경제 상황' 이 먼저다. 현재 경제가 과열돼 있다 싶으면 금리를 높혀서 대출을 덜 받게 하고 유동성이 너무 많이 풀리면 부동산 같은 자산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버리는 부작용도 있다.
경제가 너무 숨이 죽으면 금리를 낮춰서 시장에 돈을 풀어둔다. 그러니 국가적으로 금리가 낮은 것이 좋다, 높은게 좋다는 말은 좀 뜬끔없이 들릴 수 있다. 정답은 때마다 상황에 알맞은 금리 수준이 있다는 것이다.
적정한 금리 수준은 경제뉴스가 자주 업데이트해준다. 가끔은 경제뉴스가 틀릴 때가 있기 때문에 개개인이 판단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더욱이 국가 전반적으로 알맞다는 금리 수준이 개개인에겐 또 다르게 적용될 수도 있다. 이자 받으면서 먹고살고 싶은 사람에겐 금리가 높은 게 좋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처럼 돈 빌리는 입장에선 금리가 낮은 게 좋겠다. 이렇게 경제뉴스를 참고하되 내 사정을 파악하고 내 사정에 맞는 금리 수준을 떠올릴 수 있게 되면 금리 공부는 끝이라고 할 수 있다.
로또가 당첨된 이후 지금까지 경제공부를 하고 있는 당첨자 A가 말한다.
"복권에 당첨되고서도 이렇게 머리 아픈 생각을 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마지막으로 물어볼 것이 있는데 동생이 조그만 회사 운영을 하는데 미국에 물건 수출하는···. 그런데 미국 대통령이 미국만 수입하고 다른 나라는 미국 물건 안 산다고 이런저런 규제를 너무 많이 물려서 죽을 맛이래요. 미국이 손해보는 게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기축통화국의 운명이다. 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거래는 늘어나고 물가도 월급도 계속 오른다. 지불할 돈의 양도 많아져야 한다. 그러니 미국은 돈의 양, 즉 통화량이 부족하지 않도록 달러를 계속 찍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 세계에 헬리콥터로 달러를 실어다 살포할 순 없다. 그럼에도 달러는 전 세계에 골고루 뿌려져 있어야 계속 기준 역할을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달러가 많이 쓰여서 기준으로 삼은 것이니 말이다.
기축통화국 미국이 손해를 본다고?
여기서 해결 방법은 하나다. 미국의 소비자들이 다른 나라 물건을 많이 수입해서 외국에 달러를 지불하는 것이다. 그래야 달러가 다른 나라로 흘러가고, 모든 나라가 달러를 갖고 있어야 달러의 힘이 유지된다.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너무 귀해서 구경하기도 어려우면 그것을 어떻게 기준으로 삼겠는가.
그러니 미국은 어느 정도 무역적자를 보는 것이 당연한 구조인 것이다. 물론 적자가 너무 크면 문제고, 미국 대통령은 적자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외국을 상대로 흑자를 보겠다고, 달러를 더 이상 세계에 지불하지 않고 다른 나라들이 미국에 다양한 돈을 내게 하겠다면 기축통화국으로서 미국의 지위는 흔들리고 말 것이다.
기축통화만 '진짜 돈' 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지역상품권은 그 지역에서는 돈처럼 사용할 수 있지만 아무도 진짜 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기축통화 입장에서 기축통화가 아닌 화폐들은 마치 국가 지역상품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진짜 돈' 을 찍어내는 국가가 결국 세계경제의 기준이다. 강대국이 되면 다들 자국의 통화를 기축통화로 삼기 바란다. 한 나라에서도 중앙은행의 힘이 그렇게 센데, 전 세계의 돈 단위를 결정한다니 얼마나 힘이 세지겠는가.
G2라고 해서 미국 버금가는 강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이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노린 지 꽤 오래됐다. 무엇보다 경제가 중요한 요즘 세상에서 세계 교역의 기준이 되는 것만큼 확실한 슈퍼파워는 없으니 말이다. 뉴스에서 자주 언급되는 미중 무역 전쟁도 이런 패권 경쟁의 일환이다.
우리나라 금리가 안정되려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은 어떨까? 둘이 아예 안 싸우든가, 한 쪽이 확실히 세든가 해야 숨을 쉬고 산다. 이번 챕터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겠다. 무역을 해야 국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고 무역을 하려면 기축통화가 필요하고, 기축통화가 설정되면 기축통화의 금리에 우리나라 금리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슷하게 힘센 돈이 2개면 도대체 어디에 연동 시켜야 하는 걸까? 도저히 갈피를 못 잡게 된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이 평화롭게 지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주든가, 아니면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제압해서 우리나라가 어느 쪽을 따르면 되는지 확실해져야 우리나라 돈의 금리가 안정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와 한국 원화를 교환할 때, 대체 1달러 기준으로 얼마를 바꾸면 될까? 그리고 그건 누가, 어떻게 정하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환율에 공부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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